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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쓴이 Jul 03. 2016

4. 그녀들이 항상 꽃길만 걷기를

여기든 거기든 어디서든

대학교 시절, 특강을 오신 비구니께서 말씀하셨다. 

비구니가 지켜야 할 계율은 348계로, 비구가 지켜야 할 계율인 250계보다 무려 98계나 많다고,


세계여행을 떠나는 마당에 믿지도 않는 불교의 계율이 왜 생각났는지 모르겠다. 아마 두려움 때문이었으리라. 

깊은 산속에 외따로 살면서 때로는 먼길을 떠나 수행을 일삼는 비구니 스님은 여성 여행자와 비슷한 면을 가지고 있다. 그때 비구니께서 말씀하신, '여성 출가자는 남성 출가자보다 더 많은 위험에 노출된다'는 말이 계속 기억에 남는다. 상황을 바꾸어 내가 도둑/강도 혹은 그 외의 나쁜 마음을 먹은 범죄자라면 말도 안 통하는 외국인 여성 여행자를 노릴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그녀들은 외국에서는 벙어리/귀머거리에 다름없으니.


사람들은 내가 세계여행을 다녀왔다고 하면 부모님을 어떻게 설득했는지 먼저 물어본다. 

여행을 떠나기 꼭 한 달 전, 설날에 큰집을 다녀온 마지막 연휴에 소파에 앉아 이는 부모님의 뒤통수에 나는 선언했다. 

'길게 여행을 다녀올 꺼야, 비행기표도 다 사놨어' 

'돈은?' 

'다 있어'

그게 전부였다. 

이 얘기를 하면서 은근히 나는 칭찬받기를 바랐던 것 같기도 하다. 

당신들 딸이 이렇게 자라서 제 한 몸 건사할 수 있는 성인이 되었다는 선언이었으니까. 진짜 어른이 된 기분이었다.


비행기를 타고 첫 여행지에 발을 내딛을 때까지도 나는 내가 무슨 일을 저지르고 있는지 몰랐다. 공항버스를 타려고 가는 길에 왜 엄마가 억지로 김밥을 사주려고 했는지도 몰랐다. 여행지의 약한 와이파이 신호로 겨우겨우 전화할 때면 엄마는 항상 나에게 돌아오라고 말했다. 빨리 오라고, 어서 오라고

난 부모님을 설득하지 못한 채로 여행을 갔다.


그 당시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남자들의 세계에서 젊은 여자가 어떻게 보이는지 내가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정상적인 가정에서 자라 학교에서 주는 성교육으로 이론을 쌓고 신문이나 뉴스에 나오는 나쁜 일들이 내 주변/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했다. 

난 그전까진 한 번도 나를 '성인 여자'로 인식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이성과의 데이트보다는 동성 친구들과 같이 있는 게 더 즐거웠고 여성성을 어필하기보다는 사람들과 친구처럼, 동료처럼 어울리는 게 좋았다. 그러니 여행지에서 내가 '성인 여성'으로서 어떤 위험에 처하게 될지 몰랐던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아마 대부분의 여성들이 나와 비슷한 정도일 거라고 추측한다.


시리아에서 시장을 산책하고 있던 나는 길가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던 남자에게 희롱을 당했다. 밤 8시였고 주변에 사람도 많았다. 나는 긴 바지와 긴팔티셔츠를 입은 평범한 차림이었다. 성행위를 묘사하는 행동을 하며 골목으로 나를 손짓하던 그의 표정을 6년이 지난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를 뒤로하고 빠른 걸음으로 도망치는 나를 향해 그가 뭐라고 외친 것도 같았다. 방글라데시에 호텔 욕실 창문 너머로 나를 훔쳐보던 남자도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남자는 도망쳤고 화난 나는 카운터로 뛰어가 그놈을 잡아야 한다고 소리를 질렀지만 결국 커다란 자물쇠를 사 오는 것으로  스스로를 보호해야만 했다.  또 뭐가 있었더라... 기억 저편으로 묻어둔 안 좋은 기억들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 같아 더 이상의 회상은 그만하고 싶다. 아직도 그들의 눈빛이 생생하다. 어쩜 다들 눈이 크고 흰자가 또렷했는지. 욕망에 가득 찬 남자의 표정이란 다 그런 것이었는지. 


난 내가 여자인 게 좋았는데. 

아무 잘못도 없는 내가 내 존재만으로 누군가의 욕망의 대상이 되고, 위험에 처해진다는 사실이 말도 못 하게 무서웠다. 23살은 내가 처음으로 '성인 여자'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인식하게 된 때였다. 


지금도 대리님은 아름다우세요. 예쁘세요. 여자다워요 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그런 칭찬들을 부정하며 일과 성과만으로 나를 봐주기를 요구한다. 여성으로 보이는 순간 얻을 수 있는 것보다 잃을 것들이 더 두렵고 무섭다. 술도 약하고 낯도 많이 가리는 내가 20대 여성의 존재만으로 세상을 살기에는 이역만리 타지나 20년 넘게 살아온 내 나라나 위험하긴 마찬가지니까. 회식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 생각한다. 방금 그 자리에서 내가 명함을 가지고 있지 않은 '성인 여성'이라면 어느 자리에 앉아 있었을까. 내가 몇 마디나 할 수 있었을까.


신변의 안전을 이유로 여행을 혼자 떠나지 못하는 여자들을 겁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조차도 내 딸이 나와 같은 여정에 오른다고 하면 용기를 주기보다는 겁을 주어 말리고 싶은 마음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을 떠나는 여자들을 나는 존경하고 또 걱정한다.

그녀들이 항상 꽃길만 걷기를. 


@boarder, Paragu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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