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직 세계여행자의 성찰
"야 인마 자아는 평생을 찾는 건데 그게 뭐라고 여행을 가?"
22살, 혼자서 9달 동안 세계여행을 간다는 나를 향해 아빠는 호통을 쳤다. '여자 혼자 해외여행 가는 게 걱정된다'는 속 뜻이었겠지만 그때의 나는 그 말에 이렇게 받아쳤다.
"해 봐야 알지!"
그래서 해 봤다. 그것도 아주 많이.
혼자서 다녀도 보고 친구랑, 가족이랑, 연인이랑도 다녀 봤다.
길게는 9달, 짧게는 2박 3일,
이 여행이 나에게 무엇을 남겼는지 한 번 생각해 보자.
1.
사진을 찍는 스킬이 조금 는다. 당신 눈앞에 로마의 콜로세움이 있다면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마침 하늘은 파랗고 구름은 멋지다면? 평소에 사진을 안 찍는 나도 그 순간만큼은 사진작가에 빙의해서 바닥에 누워서라도 멋진 사진을 남기게 된다.
2.
낯선 사람과의 대화에 익숙해진다. 아무리 인터넷에 정보가 많다고 해도 최후의 수단은 사람이다. 게스트하우스 거실에 있는 같은 처지의 여행자이거나 현지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대화가 쌓이다 보면 어느새 처음 보는 사람에게 눈을 맞추며 다가가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3.
안 되는 것에 적응하게 된다. 늘 보던 웹툰을 로딩하는데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에 놀라게 된다. 어떤 도시에서는 늦은 밤 시내에 나가도 맥주 한 잔 할 수 있는 가게가 없을 수도 있고 야식을 배달시킬 수도 없다. 스타킹을 사기 위해 편의점을 찾아 30분을 돌아다녀야 할 수도 있다. 카페에 자리를 맡을 때 핸드폰을 올려놓으면 곧 그 핸드폰과 이별하게 된다는 걸 알 수밖에 없다.
4.
생각보다 여행이 즐겁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사실 이때부터가 여행의 시작이다. 앞의 1, 2, 3을 겪고 나면 이제 어느 정도 새로운 것도 많이 봤고, 놀만큼 놀았으니 집에 가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마다 그 시기는 다르겠지만 나는 한 달 정도를 기점으로 여행의 매너리즘에 빠졌다. 좁아터진 도미터리 대신 집으로 돌아가 김치찌개에 계란말이를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매번 처음 만나는 사람들 말고 나를 아는 사람들과 마음껏 떠들고 싶은 마음이 든다. 이 마음을 달래기 위해 현지에 있는 한국 음식점을 찾아가 양배추로 만든 5만 원짜리 김치찌개와 그럴싸한 계란말이를 먹는다.
5.
나에게 질문을 던지게 된다. 김치찌개로도 향수를 달랠 수 없을 때쯤 몇 가지 질문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나는 왜 이 먼 길을 떠나야만 했을까?'
'남은 돈으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꼭 와야만 했던 걸까?'
이 세 가지 질문이 빙빙 돌면서 계획을 포기하고 집으로 가는 선택과 계획대로 좀 더 이방인이 되는 선택지 사이에서 고민하게 된다. 도중에 집에 왔던 적도 있고 계획대로 일정을 완수했던 적도 있었지만 그중에 정답은 없었다. 중요한 건 이런 질문은 충분히 외로워야만 나온다는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나에 대해 더 잘 알게 된다.
그러니까 나는 나를 만나러 떠난 거다.
이 무슨 파랑새는 우리 마음속에 있다는 말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사실 맞다.
여행은 나를 알게 하지만 그것이 내 인생을 바꿀 만큼의 파급력이 있는 일이었는지는 의문이다. 애초에 내가 나를 아는 게 뭐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는 잘 모르겠다. 누군가는 알던 사실을 재확인하는 것에 그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건 꽤 즐거운 경험이었다는 것이다. 스스로를 의지해서 낯선 타국을 지나 무사히 집으로 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나에 대한 신뢰와 추억이 있다. 내가 나를 좋아하게 되는 이유가 몇 가지 더 늘었으니 그것이 여행이 내게 남긴 것들이라고 말해도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