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시리즈, 토토가의 파워, 그리고 리메이크 열전 등..
추억, 복고의 열풍이 진하게 퍼지고 있다.
휴대폰이 없던 그 시절,
하이텔과 천리안 접속에 목마르던 그 시절.
지금은 파란만장한 인생들을 살거나
훈훈한 옆집 아줌마 아저씨가 되어 안방극장을 지켜주는
연예인들의 리즈시절을 되새기며
같은 세대를 공유한 묘한 세대 동질감을 확인하기도 하고,
지금은 찾아 볼 수 없는 숨겨진 꿈과 끼를 내비치기도 하고,
저 밑바닥 꽁꽁 찌꺼기처럼 붙어있던
그 시절 첫사랑이 순간, 반짝, 떠오르기도 한다.
그것이 이 추억시리즈가 부활한 이유이며,
진하게 그 열풍을 이어나가는 이유이지 않을까.
누군가 나에게 추억, 복고라는 코드로
끌어낼 수 있는 이야기들을 브레인스토밍 해보라고 한다면
학창시절, 우정, 치기, 열정 등의 단어들이 나오겠지만
아마도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단어가
첫사랑이지 않을까 싶다.
모두에게 어떤 식의 형태로든
그것이 애잔함이든 풋풋함이든
그 혹은 그녀에 대한 그리움이든
그 시절 자기 자신에 대한 그리움이든
이미 사실관계는 희미할대로 희미해져서
그가 떠난건지, 내가 떠난건지
정확히 기억은 안나지만
머릿속에 각색된 형태로 많은 이미지와 느낌만이
존재하며
노래든, 드라마든, 날씨든 그것을 환기시킬 수 있는
매개체가 있다면 형태없는 감각으로
분사되는 그것, 첫사랑이다.
<응답하라 1988>의 정봉이가 장만옥을 만났을 때
왠지 모를 풋풋함에
온몸이 간질간질해지고 말았다.
핸드폰이 없던 시절이었기에
그들은 같은 까페 공간안에 있었음에도
서로를 발견하지 못하고
한없이 속만 태우기도 한다.
미국이라는 곳으로 장만옥이 떠났을 때
그저 먼 공간 어딘가의 곳이었기에
잊으라는 말로 그렇게 작별할 수 밖에 없었으며,
천리안과 하이텔의 도입으로
그들은 우연한 기회에 접속하게 된다.
97년에 유명했던 영화 '접속'처럼..
그리고 그렇게
까페의 문 앞에 달아놓은 종소리마다
그녀일까, 그녀일까
마음 조리고..
무슨 말을 어떻게 할까.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나타날까..
마음 조리다..
다시금
눈 앞에 나타났을 때
준비했던 그 어떤 말도, 그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서로의 품 안에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할 뿐..
장만옥의 집 앞에서
엉덩이를 뒤로 쭉 빼고
최대한 어색하게 첫 포옹을 나누었을 때도
조심스럽게 학 천마리를 접어
끝끝내 그녀에게 전달하지 못했을 때도
그 애잔함과 풋풋함에
온몸이 간질거리는 민망함과
그 설렘과 두근거림이
이제는 드라마를 통해서
환기될 수만 있는 것인가 싶은
아쉬움이 스멀거렸다.
가끔은 설렘과 두근거림이
20대 초반에만 느낄 수 있는
전유물인가 싶어질 때가 있다.
어느 순간 누군가를 만나는 일이
'결혼'이라는 목적을 향해
끊임없이 고민해야 하는 '일'처럼
되어갔고
사소한 말투, 눈빛에
울고 웃었던
하루의 감정과 하루의 기분이
좌우했던
그 시절의 치기가
떠오르긴 하나 낭비하고 싶지 않은
에너지가 되어갔다.
죽을 거 같은 실연도
시간이 흐르면 희미한 자욱만
남긴 채
살아가고 있었고,
수없이 세웠던 미래의 계획과
수많은 밀어들도
'헤어지자'는 말 한마디에
공수표가 되어 버리는 것이
관계의 현실임을 알기에
어느 순간 일정한 선이 주위에 둘러 있었고
그 선을 넘지 않으려 끊임없이 노력하며,
통제된 이성은 감정까지 통제해,
설렘도 두근거림도 점차 무뎌져만 갈 뿐이었다.
하긴 굳이 설렘이나 두근거림이 아니어도 된다.
누군가를 알게 되고, 누군가가 내 인생에 들어오려 할 때,
혹여 그가 차지하는 내 인생의 부분들로
내 인생이 흔들리게 될까,
혹여 내가 알지 못하는 티끌만한 것이라도
지금껏 일껏 다져온 내 것들을
흔들어 놓지 않을까
두려움이 먼저 앞서기에
나이를 먹을수록
그 선을 넘어서기가
누군가를 그 선 안으로 들이기가
너무 힘겨운 일이 된다.
종편 방송에 종횡무진 활동하며
각종 이야기들을 쏟아내는 유인경 기자가
얼마전 신간을 냈다.
<내일도 사랑을 할 딸에게>
첫머리에 이런 말이 있었다.
물가에 서서 혹시나 빠지지 않을까
발조차 담그지 못하고,
'이 사람이 저를 좋아하는게 맞을까요'
'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끊임없이 자신의 감정을 타인에게 묻고 있는
딸들에게
'사랑은 뛰어든는 것이지 빠지는 것이 아니다
엄마도 사랑이 두려웠단다
사랑이 두려워지더라도 일단 해보렴.'
응답하라 1988을 보며
같이 웃고 같이 애태웠던 우리에게
그 시절 그리웠던건
이미 희미해져 버린 옛 사랑의 기억이 아니라
어쩜..
자신의 감정이 정확히 무언지 모르겠지만
한번도 느껴본 적 없는 그 감정이
두렵고, 신기하더라도
꺼내어 세게 감정의 민낯을
부딪쳐 본 그 시절 자신에 대한
그리움이 아닐까..
이성이 통제할 수 없는
감성이 들끓고
낭만적 미래만을 꿈꾸기에
가능했던 용기들..
험해져만 가는 세상에
홀로 자신을 지켜야 하기에
발달시켜야 하는 방어 기제는
어쩔 수 없지만..
아주 조금만 방어 기제를 풀어 놓는다면..
선 안에 누군가
내 인생의 잔잔함을 깨트린다 해도..
그 파문이 내 선을 확장시키고
그 파문이 잔잔함 속에 숨어있던
내 본연의 모습을 끌어올릴 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