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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매일매일성장통 Aug 02. 2016

결혼, 시작되는 고민들을 위하여 (9)

윷판에 서서 5개의 윷을 던졌다. 


던지기 전의 초조함과 

어떤 패가 나와야 상대방을 먹거나, 

앞으로 전진할 수 있는지의 온갖 계략과 

내 운명이 어떨지 등의 불안감이 

엄청났다. 


사실 안 던지고 그 자리에 그냥 서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윷판에 선 이유는 

내 말을 움직여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꽝이 되건, 앞으로 움직이건 

인간으로 태어나서 

다양한 일들을 겪어가며 사는 게 

하나의 삶이라면 


한번쯤 움직여 보는 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윷판에 서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윷을 던지기까지 

큰 심호흡을 계속 해야만 했다. 


확신따윈 없다. 

좋은 패 따위도 없다. 

윷이든 모든 도든 

그 말이 어떻게 풀릴진 

지켜봐야 아는 것이다. 




엄마에게 남자친구가 있다는 얘기를 꺼낸 것은 

예상했던 것처럼 

내가 윷을 던진 것과 같은 결과를 낳았다. 


알 수 없는 압박들은 나에게 

결정의 순간을 내려야 한다고 

암묵적으로 죄어왔다. 


선택은 내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작은 말 하나하나가 다 

신경이 쓰였다. 


'니 아빠같은 사람인거 같아' 

이 말이 이렇게까지 

화가 나는 말인줄 그 전엔 미처 알지 못했다. 


딸의 남자친구 얘기에 

무조건 화색이 돌던 엄마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나왔다. 


사실, 이렇게 화가 난 건 

어쩌면 그렇게 보일 수 있는 

여지가 있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없진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빠라는 사람.. 

이제는 내 기억 속에 

희미한 존재로 남아있는.... 


나쁜 사람이라 말 할 수 없지만, 

남편이자 아빠로서의 역할을 

다른 사람들이 으례히 그런것처럼 

묵묵히 짊어지고 나선 사람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 치킨을 사들고 들어온 

아빠의 팔에 대롱대롱 매달리며 

애타게 치킨인지 아빠인지 모를 존재를 

기다리던 기억이 있다. 


학교를 걸어가는 길에 

누군가의 따뜻한 손이 

내 손을 잡는 것에 흠칫 놀라 

쳐다본 그 곳에 

그렇게 서있었던 아빠의 기억도 있다. 


그러나 어쨌건 떠났던 그 사람은 

이제와 돌이켜 생각해 보면 

가끔을 불쌍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 사람이 필요했던건 사회적 인정이었다. 

머리가 좋았고, 손재주가 많은 사람이었으나 

끝맺음이 희미했고, 결정적으로 

실속보다는 명예욕이나 권력욕 같은 허세가 

더 강한 사람이었다. 


좋은 집안에 좋은 환경에서 자라 

원하는 대로 명예와 권력을 가질 수 있었다면 

인생이 어쩌면 잘 풀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댈 데 없는 집안에서  

이상은 높되 현실은 이상의 발꿈치도 

따라가지 못하고, 


본인 혼자의 몸도

 그 인정하기 싫은 현실 속에 

질질끌고 가기 힘든 와중에 


와이프와 자식들까지 짊어지자니 

날아가고 싶은 본인의 이상은 

자꾸만 멀어지고, 

어깨엔 무언가 주렁주렁 매달린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런 허영심이라고도 감히 말할 수 있는 

이상에 대한 애탄 갈망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도 보였는지 

그 갈망을 악용해 


"돈을 만지려면 사업을 해야지" 

"모임에 회장 정도는 해야지" 

라는 말로 부추기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렇게 잡은 사업이 와르르 무너지고 

언젠가 터질 일이었겠지만 

그 사건은 도화선이 되어

많은 문제들을 야기시켰다. 


결국 한 가족의 구성원 모두에게 

어떤 식으로든 상처를 남겼고


이제는 기억마저 희미해져 버린 

그 사람의 이미지는 

늘 '착한 사람'이고 

늘 '있는 사람'이고 싶은 

이제는 '불쌍한 사람'이었다. 




착하다는 표현은  

사람으로써, 동료로써, 친구로써 

무난하게 어울리기에 충분한 

수식어가 되겠지만 

'착한 사람'의 아내로 산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 줄 

진작에 아는 엄마이기에 


혹여 그 '착함'의 이면에 

우유부단함과 틔미함 

가족마저 지킬 수 없을 지도 모르는 

유약함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 

아닐지 두려웠을 것이다.  


나 역시 

자신의 감정을 꽁꽁 싸매고 

철저하고 지독하게 자신을 통제하며 

자신의 목표를 향해 강하게 올라가는 

그런 사회적 기준의 '남성적'인 사람들에 

강한 반발을 느껴서인지  


자신의 감정을 다 내보이고 

이성보다는 감성이 살아있고 

두 손 가득 물건을 사놓고도 

길에 앉아서 물건 파시는 할머니가 안 되 보여 

그 물건을 또 사는 그 남자의 

가슴 따뜻함이 참 좋으면서도 


그것이 혹시

유혹 많은 세상에서 

자신조차 지키지 못하는 

유약함으로 발현되지 않을까 

조바심이 나기도 했었다. 




하지만. 

누군가를 만나는 이유가 

헤어지는 이유와 일치한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결국 그 사람에게 강하게 나타나는 

특성은 

나를 그 사람에게 끌리게 하기도 하고, 

그 특성이 만들어내는 각종 상황들이 

그 특성이기에 멀어지게 만들수도 있는 법. 


단 걸 먹기 위해서는 

쓴 걸 삼켜야만 한다는 것이다. 


모든 선택에는 두려움과 불안함, 

선택으로 인해 벌어질 각종 상황들에 대한 

공포가 기저해있다. 


어쩌면 그렇기에 선택은 늘 어려운 것이며, 

선택을 회피해버리고, 내가 아닌 남을 

선택의 자리에 세우면서 

선택으로 주어지는 책임도 

남에게 지우고 싶어하는 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찌보면 

생각이 너무 많은 사람이 

더 불행할 수 있고, 

선택의 폭이 너무 많은 것이 

선택권 확보이기 이전에 

더 많은 불행을 야기시킬 수 있다. 


어쨌건 나는 선택의 기로에 섰고, 

이미 내 말을 움직이기로 한 이상 

내 말을 움직이기로 한 그 매개체가 

뚜렷한 형태를 가진 

명확한 이유가 있는 

당장 앞에 벌어진 

그런 불안감이 아닌 이상 

불안감을 삼키고 앞으로 나가기로 했다. 


선택을 해버리고 나면 

한결 쉬어질지도 모른다. 

어쨌건 난 늘 내 선택에 

합리화를 하며 살아갈 테고  


설사 이 선택이 내 인생에 

많은 슬픔과 고통을 안겨 온다 할지라도 


달달한 행복을 맛봤던 기억들. 

그리고 그 고통을 통해 

인생의 참맛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을 

위안 삼으며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누구와 결혼하느냐보다 

내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결혼하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인 듯 하다. 


언제 결혼하느냐보다 

내가 어떤 마음의 준비를 하고 

결혼을 대하느냐가 더 중요할 것이다. 


누구나 결혼을 인생의 중대사라 여기지만 

어찌보면 어떤 타인이 내 인생에 들어온다 할지라도 


중심의 축을 강하게 다지고 

그 파장력을 타인과 함께 나눌 수 있는 

유연성을 가지며 


무엇보다 일상의 사소한 것 

하나하나

혼자가 아닌 둘이기에 누릴 수 있는 

사소한 일상들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지금은 구속과 부담, 

희생과 모든 것의 포기 등으로 

가치 폄하되고 있는 

결혼이라는 것이 


원래 의미 그대로 

누구나 쉽게 말 하는 '축하해'의 

의미 그대로 

인생의 축복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안다. 걸어보지 않은 길이기에 

쉽게 말할 수 없음을. 


그러나 이미 윷판에 서서 

윷을 던진 사람이기에 

내 말이 가져다는 운명을 


겸허히, 때로는 열렬히 

사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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