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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빌레트번역가 Dec 30. 2017

불쌍하다 말하기 전에

작업실 오는 버스 안에서 어김없이 김생민의 영수증을 듣고 있었다. 오늘 영수증의 주인공은 외벌이 400만 원에 아이 셋을 키우는 (지금은 휴직 중인) 주부였는데 남편의 용돈은 한 달 5만 원이고, 나머지 거의 모든 지출은 아이들을 위한 것이다. 학원을 보내고 로봇을 사주고 공연을 보여주고 새 옷을 사주고 방에 조명과 커튼을 달아주지만 엄마 본인을 위한 소비는 생일에 산 19000원짜리 신발이 거의 전부였다. 사연의 주인공과 마지막에 전화 인터뷰를 했는데 이렇게 말했다. "제 영수증이 방송되고 게시판에 올라온 댓글들을 읽었는데요. 거의 다 불쌍하다. 안됐다. 우리나라에서 외벌이에 애 키우면 저렇게 되는구나. 하더라고요. 아닌데? 저 행복한데? 우리 가족 많이 행복한데요. 그리고 이 19000원짜리 신발 아주 잘 신고 다니는데 이게 그렇게 불쌍한 건지 몰랐어요." 

이 부분을 들으며 뭔가 한 방 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여성의 목소리는 밝고 명랑했다. 부부 사이가 좋고 초등학교부터 유치원 아이 셋이 있는 집이 얼마나 복작복작하면서 다복할지가 눈에 선하게 그려졌다. 외동아이를 키우는 나는 만약 둘째가 있었다면 내가 모르는 어떤 행복을 가져다주었을까를 상상해보기도 한다. 하지만 싱글이나 딩크가 모르는 아이 키우는 특별한 행복이 있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 말에서 내가 멈칫한 건 사람들이 소비 생활에 따라 타인의 행복을 함부로 재단한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풍족한 소비 생활은 행복과 직결되는 것처럼 부러워하고 조금 덜 쓰고 아끼는 사람 앞에서 이렇게 말한다. 처량 맞다고. 불쌍하다고. 


일단 19000원 신발은 문제가 안된다고 생각한다. 내가 느끼기에 공산품의 품질은 나날이 좋아져서 가격에 따른 질적인 차이가 그렇게 크지 않다. 3년 전에 6000원을 주고 산 기모 레깅스보다 올해 같은 가격에 산 기모 레깅스가 훨씬 더 두껍고 따뜻하며 근래에 나온 19000원 신발은 몇 년 전에 백화점 매대에서 5,6만 원을 주고 산 신발보다 더 편하고 튼튼할 수 있다. 보는 눈만 있다면 보세 매장에서 얼마든지 한 계절 내내 입을, 질 좋고 예쁜 옷을 구할 수 있다.  

점점 예민하게 경제적 차이를 느끼게 되는 분야는 의류나 공산품보다는 외식이나 식재료다. 명란젓과 소고기와 사과는 5000원 10000원 차이에 따라 맛이 완전히 달라지면서 그 앞에서 깊은 고민에 빠지게 만든다. 콩쿠르상 수상 작가인 레일라 슬리마니 인터뷰에서도 이런 글을 읽었다."이제 계층 계급 간의 충돌은 마르크스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디테일에서 온다. 대표적인 게 음식이다." 고급 식재료를 가격표에 연연하지 않고 턱턱 집어서 계산할 수 있는 경제적 여유가 부럽긴 하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하려는 것도 아니다. 사실 나 같은 경우 명품과 미식을 그리 탐하지도 않는데 사실 다채로운 경험을 해 본 적도 많이 없어서 그 차이를 잘 모르기 때문인 것 같다. 또한 기본적으로 사람은 한 번에 한 벌의 옷을 입고 하루에 세 끼 밖에 먹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나는 혼자 일해서 옷이 많이 필요하지 않고 집밥을 먹건 외식을 하건 남이 해준 건 뭐든 맛있다(내가 한 밥만 아니면 된다). 그래서인지 못 입고 못 먹어도 크게 열등감이나 결핍감을 느끼지 않는 편인 것 같고 나와 같은 사람도 적지 않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건 우리는 특별한 경우 아니면 수입이 고만고만하고, 한정된 수입을 배분하는 분야와 방식이 각각 다를 뿐이라는 것이다. 엄마는 아이의 방과 후 수업비는 아무 고민 없이 입금하지만 자신의 옷이나 신발 앞에서 갈등한다. 그때 그녀가 스스로 안쓰럽고 구차하다고 느끼는 것도 아닐 것이다. 그녀가 정말로 쓰고 싶은 곳인 자녀 교육에 쓸 수입은 충분히 있기 때문이다. 반드시 외벌이에 자녀 둘 이상을 키우는 부부만 제한적인 소비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다. 아이가 없는 사람 역시 의류비와 외식비는 아끼지만 인터넷 서점에서 수백 권의 책을 살 수도 있다. 점심은 컵라면으로 때워도 예술의 전당에서 유명 오케스트라 내한 공연을 보기도 한다. 우리는 어떤 분야에서는 남들 보기에 '쪼들리게' 보일 수 있지만 애초에 그렇게 하기로 선택했다. 우리가 그 점에 별로 개의치 않기 때문이다. 나에게 더 큰 만족감을 주는 다른 분야에 소비를 하기로 했고 그곳에서 이미 얻을 수 있는 만족은 얻었다.  


어쩌면 같은 휴일, 같은 24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가 천차만별인 것과 비슷하다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루 종일 집에서 꼬물거리며 놀기를 택한 사람과 전시를 가고 운동을 하는 사람의 행복감을 잴 수 없는 것처럼. 그렇게까지 큰 차이가 나지 않는 수입을 어디에 쪼개 쓰는지는 각자 의도와 목적에 따라 달라진다. 그냥 다를 뿐이다. 남들의 소비 생활에 자신의 기준을 적용하여 행복의 유무를 판단할 수는 없다. 

남편 한 달 용돈이 얼마이고 얼마 짜리 신발을 신는다 해서 '이래서 우리나라에서 아이를 낳으면 안 돼. 셋이나 낳아선 안돼. 불쌍해. 안 됐어."라고 말하기 전에, 그들이 내가 상상하지 못하는 곳에서 행복을 얻고 나와는 다른 인생을 살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한 번쯤 생각해보면 안 될까. 결국 나는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인가. 뭔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었던 것 같은데 뭔지 아직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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