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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준가 Dec 12. 2017

그 겨울의 주말 그리고 패딩

빌레트(villette)  

villette420@hanmail.net




모든 사건 사고가 일어나는 하루가 그렇듯이 어떤 불행이나 불화의 기미도 보이지 않고 평온하게 시작된 날이었다. 남편은 금요일에 반차를 내어 집에 왔고 같이 자동차 검사장으로 가서 검사를 마치고 쿠쿠 밥솥 AS를 받을 예정이었다. 나 혼자 해도 되는 일이지만 남편이 운전해주고 나 혼자 처리하기 싫은 일을 같이 해준다고 하니 고마웠고 데이트라고 할 순 없지만 평일 낮에 둘이서만 드라이브 겸 외출을 가는 것이 나쁠 것도 없었다. 참고로 우리 자동차는 결혼할 때 산 15년 된 아반떼로 이제는 창에 중고차 매매 스티커가 아니라 폐차 스티커가 종종 붙는 차다. 그래도 남편도 나도 차를 워낙 쓰지 않아서 6만 킬로미터 정도밖에 뛰지 않았다. 물론 그 사이에 무수한 잔고장으로 돈깨나 잡아먹었고 아이는 차를 탈 때마다 냄새가 난다며 오만상을 찡그리곤 했지만 올해만 버티자 올해만 버티자 하면서 지낸 지가 몇 년째였다.


자동차 검사장에는 기다리는 차가 많았고 줄은 쉽게 줄어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차 안에서 서로 다정한 담소를 나눌일도 없는 중년 부부인 우리는 라디오를 틀었고 나는 곧 지루해졌고 마침 검사장 앞에는 아울렛 매장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 전에도 자동차 검사를 받으러 왔을 때 잠깐 들러 마음에 드는 꽃무늬 여름 원피스를 샀던 기억도 있었다. "나 잠깐 아울렛 다녀올게." 검사는 남편에게 맡기고 나는 종종거리며 아울렛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왔지만 생각보다 다양한 아웃도어 매장들이 즐비하여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다. 오늘은 무언가를 사게 될 것이 분명하다는 여자만의 직감이랄까. 안 그래도 갑작스럽게 덮친 강추위에 입을만한 패딩이 없어서 쇼핑이 긴급히 필요한 차였다. 매년 겨울에는 코트이건 패딩이건 괜찮은 아웃웨어에 투자를 했었지만 언젠가부터 재작년, 아니 4-5년 전에 입었던 패딩을 드라이를 하여 아이가 입다 만 스웨터나 기모 맨투맨 위에 입던 날들이 반복되었고 나는 조금 지쳐 있었다. 아이에게는 교복 위에 입을 브랜드 롱패딩을 진작 사주었지만 나는 보온성이 현격히 떨어진 오래된 패딩으로 이 추위를 뚫고 작업실을 다녀야 하는 것이 덜컥 겁이 났고 나도 이제 덕다운이 아닌 빵빵한 구스다운이란 걸 하나 사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처음 들어간 매장에서 처음 입어본 무릎까지 오는 카키색 기능성 구스 다운을 3개월 할부로 사서 쇼핑백에 넣었고, 자동차 검사를 마친 남편과 만나 "나 옷 하나 샀어." 하며 쇼핑백을 뒷자리에 던져 놓았다. 남편은 그러거나 말거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우리는 같이 밥솥 AS 받고 집으로 왔고 난 집에 오자마자 새 옷을 입고 "너무 짧은 거 아닌가. 색깔이 괜찮나?" 거울 앞에서 요리조리 살펴보았다. 그때 남편이 무심히 한 마디를 던졌다.

"그런 옷 있지 않아?"

"뭐라고? 없거든? 아니거든." 여기서 그쳤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남편의 그 말에 어떤 저의가 있다고 느꼈고 그동안 가슴에 차곡차곡 쌓였던 분노와 불만을 쏟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옷 하나 산 게 어때서? 자기가 시어머니에게 그렇게 용돈을 많이 드리지만 않으면 우리 형편이 이렇지 않잖아. 시어머니 과소비 때문에 내가 왜 겨울 옷 하나 못 사고 덜덜 떨면서 다녀야 하는 건데? 시어머니 소비 생활에 왜 내가 피해를 봐야 하는 건데." 그런데 난 여기서도 그치지 않았고 집안을 씩씩거리며 돌아다니며 몇 마디를 더 쏘아붙였다.

그리고 평소 이 문제로 내가 신경을 몇 번 건드렸어도 가만히 있던 남편이 그런 말이 아닌데 왜 그러냐고 했다가 점점 더 화를 내더니 평소에 입에 담지 않던 센 단어 한 마디가 그와 나 사이의 공기를 가르고 튀어나왔다. (순한 사람이 화를 내면 움찔할 정도로 무섭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기가 팍 죽은 나는 침대에 누워 인터넷에서 내가 산 옷의 브랜드를 치고 패딩이란 단어를 쳐보았다. 품번을 비교해보았다. 같은 제품이 맞았다. 인터넷으로는 최대 6만 원가량 저렴하게 살 수 있었다.

당장 환불을 하러 가야겠다고 생각했으나 조금은 귀찮아 내일 아침에 문 열자마자 가야겠다고 잠시 미루기로 했다. 그와 동시에 이 상품을 창고에서 꺼내 주고 입에 발린 칭찬을 해주고 스팀다리미로 다려주며 모자의 털을 보송보송하게 살려준 친절한 여자 점원에게 '환불할게요'라는 말이 차마 입에서 절대 떨어질 것 같지 않았다. 내일 아침에 환불하러 갈 때 다른 직원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 날의 불운이 거기에서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침대에 누워서 30분째 환불할까 그냥 입을까 고민하고 있을 때 아저씨들이 현관을 두드렸다. "실례합니다. 이 집이나 다른 집 싱크대에서 물이 새는 것 같아 검사 나왔습니다." 그리고 우리 집 싱크대 상태를 보면서 말했다. "이 집이네."

우리 집은 지은 지 30년이 넘은, 대부분이 올수리를 해서 사는, 한 번은 아파트 전체가 정전이 되어 뉴스에 나기도 했던, 요즘처럼 추운 겨울이면 보일러실에 낡은 옷들을 겹쳐두어야 하는, 어떻게든 하루하루 수명을 연장해가고 있는 늙어 꼬부라진 아파트이다. 얼마 전부터 우리 집 싱크대 물 빠짐이 심상치 않았지만 대강 테이프로 막아가면서 버티고 있었는데 관리실 수리 담당 과장님은 이대로 나누면 물이 새서 우리 아랫집 도배비까지 물어주어야 할지 모른다고 했다. 다행히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싱크대 수전을 당장 바꾸어야 한다고 했고 몇 번을 왔다 갔다 하며 싱크대 수전을 새롭게 바꾸어준 아저씨가 말했다. "17만 원입니다."



아저씨가 가고 난 후 그때까지 화가 풀리지 않았던 남편은 이제 좁고 낡아빠진 이 집을 선택한 나를 탓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토요일 늦은 밤 우리는 예민한 중학생 아이가 다 듣고 있는 가운데 돈문제로 원색적인 부부싸움을 하기 시작했다. 

남의 부부 싸움을 굳이 듣고 싶어 할 리 없고 나 또한 더 이상 말하기에 구차하므로 이쯤에서 간단히 요약하자면, 나는 남편의 아무 뜻 없는, 오히려 관심을 보이려고 했던 '그런 옷 있지 않아?'에 민감하게 반응해서 꺼내지 않아도 될 말을 꺼냈고 내 문제였다고 미안하다며 사과하며 대강 무마를 했고, 우리는 여전히 상처를 입은 채 따로 잠에 들었다.



왜 이렇게 되어 버렸을까. 사실 우리는 참으로 다채로운 주제로 부부싸움을 했어도 돈문제로 잘 싸우지는 않는 부부였다. 남편과 나는 각각 서울 변두리와 경기도에서, 배운 건 없지만 뚝심과 부지런함 하나로 자영업으로 성공한 부모님 밑에서 한 번도 경제적인 어려움 없이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물질에 관심도 적고 사치를 하지 않고 서로의 소비에 간섭도 하지 않는, 대출도 거의 갚아가고, 아이를 키우지만 외동이라 그렇게 교육비 때문에 허덕이지 않아도 되는 이들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40대 중반이 되어가고 있으며 남편은 안정적인 직장에 다니지만 정년까지 다닐 수는 없을 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며 늙어가고 수입이 줄어드는 부모님에 대해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 그리고 잠깐! 여기서 내 이야기를 해야겠다. 내가 왜 이렇게 쪼잔하고 궁색한 사람이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듯하다. 나는 거의 14년째 번역으로만 밥벌이를 하고 있는 소위 전문번역가이다. 내가 번역가로 최고의 수입을 올렸던 해는 일한 지 5,6년 째였다. 번역료는 10년 동안 오르지 않았고 일하는 속도는 점점 느려졌고 하루에 8시간씩 일해도 수입은 차마 말하기 부끄러울 지경이 되었으며 그 사이에 나는 백화점 1층의 화장품과 향수 냄새를 맡으면 생의 의욕이 솟아나곤 했던 사람에서 백화점에 가면 황급히 지하 식품 매장으로 직행하며 세일하는 돼지갈비를 사는 사람으로, 커피값이 아까워 카페 가기를 참고 대신 대용량 원두를 사다 놓고 커피를 내려 마시고, 밥값이 아까워 도시락을 싸오고, 가성비에 목숨 걸고, 아울렛에서 파격적으로 세일하여 산 옷도 인터넷과 비교해 환불을 고민하는, 김생민이 뜨기 이전부터 이미 '생민스러움'을 철저하게 실천해온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런데 소박하고 알뜰하다는 건 장점이 분명해도 조금 더 심해지면 나와 주변 사람을 불편하게 한다. 열등감과 불안함이 잠식하면 인간 자체가 옹졸해진다. 내 옹졸함 때문에 가족을 지나치게 공격했고 나 자신까지도 피폐하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이쯤에서 잠깐 내 태도를 돌아보고 조금 더 나에게 여유를 주어야만 한다. (give myself a break)


일요일 저녁 남편이 만든 닭볶음탕에 6900원짜리 이마트 와인을 마시면서 우리 집은 다시 평화를 찾았다. 그리고 이제까지 우리가 겪었던 이보다 더 심했던 불화들이 그랬듯이 '이 또한 지나가리라'가 될 것임을 알았다.


새로운 한 주일이 시작되었고 서울은 모스크바보다, 알래스카보다, 레이캬비크보다 더 낮은 기온을 기록했다.


나는 금요일에 산 옷을 입고 나왔다. 환불 같은 거 안 하길 정말 잘했지. 무적이었다. 바람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등산복 브랜드의 구스다운 거위 솜털 90퍼센트는 강력한 마법을 부렸다.

이 옷이 촉발한 언짢은 기억 같은 건 하나도 나지 않을 정도로 새 패딩은 따.뜻.했.다.










*이 글은 빌레트 님이 보내주신 글입니다.

 

*현시대의 가난을 주제로 글을 이어갑니다. 

다른 작가님들도 참여하실 수 있도록 매거진을 열어 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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