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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준가 Dec 22. 2017

<딸에 대하여>

엄마에 대하여

! 스포일러 주의


딸에 대하여(김해진)



이 책을 빌린 지는 꽤 오래 되었다. 처음에 몇 장을 읽다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아 덮어두었는데, 오늘까지가 반납일이라 어제 오늘 급히 읽었다. 그리고 급히 읽는다고 잘 읽힐 만큼, 처음의 몇 장을 빼고는 좋았다. 

'괜찮았다' '좋았다' '흡입력이 있다' 등등 여러 말을 생각했지만 딱히 적당한 말이 아닌 것 같다. 별로인 부분도 많은 글이었다. 하지만 덮고 나니 자연스럽게 혹은 필연적으로 나와 엄마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소설의 화자는 엄마다. 그리고 레즈비언인 딸이 있다. 그 딸은 레즈비언인 것도 모자라서(?) 자신의 파트너와 함께 엄마 집으로 들어와 산다. 엄마는 늘 전전긍긍한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이 애가 이렇게 '정상이 아닌' 것이 내 탓이라고 하려나. 얼마나 이상해 보일까. 내가 애를 잘못 키운 걸까. 그리고 엄마는 딸의 파트너를 미워한다. 네가 뭔데, 내 딸의 인생을 잡고 놓아주지 않느냐며. 당장 딸의 파트너를 내쫓고 싶지만 그쪽도 호락호락하지는 않다. 상주로 남자만 찾는 세상에서, 딸은 태연하게 자신이 상주를 하겠다고 말하지만 엄마는 그 사이에 또 부끄러워진다. 남자가 없어서. 앞으로도 없을 것 같아서. 


그러므로 이제 나는 저기 반대편에 모여 선 사람들처럼 말할 수 없다. 그래서는 안 된다. 이 애들에게 보이지 말라고 이야기하고, 조용히 침묵하라고 명령하고, 죽은 듯 지내거나 죽어 버리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 편에 내가 서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애들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의미하는 건 아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에 서 있는 걸까. 서 있어야 할까.

<딸에 대하여> 본문 중



엄마는 갈팡질팡한다. 완벽한 가족의 상이 있고, 그 가족만이 사람을 지켜주는 테두리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는 엄마. 자신과 딸이 아무 가족 없이 쓸쓸히 죽어버리는 비극적인 결말을 상상하며 딸과 딸의 파트너를 밀어냈지만, 딸과 그 애가 현실을 모르고 헛된 꿈만 꾼다고 생각했지만 실상 그들이 서 있는 곳은 단단하다 못해 사람을 짓이기는 돌 위다. 





                                                  
 내가 가난한, 앞으로도 부자가 될 일이 없어 보이는 남자와 결혼한다고 했을 때 우리 엄마도 그런 마음이었을까. 저것이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저렇게 허튼 소리를 한다고 여겼을 거다. 그럼에도 딸이니까, 끝까지 미워하지 못하고 심하게 반대하는 아빠를 설득하고 나를 위로했던 엄마. 엄마 마음에도 사윗감이 차지 않지만 엄마마저 그러면 영영 딸을 잃게 될까봐 그게 더 무서운 엄마. 엄마 마음에서도 하루에도 수십 번씩 싸움이 일어났을 것이다.

나는 우리의 그리고 모두의 예상대로 가난하게 결혼해 가난하게 살고 있다. 출판사에 다니며 착실히 모은 돈은 결혼과 신혼 살림을 구성하는 데에, 그리고 초기의 생활비로 다 써버렸고 최근은 내가 외주 작업을 하며 받는 돈과 남편의 적은 수입으로 살아가고 있다. 당연히 저금은 할 수가 없다. 생존이 우선이다. 다행히 집이 변두리 저렴한 전세라 대출이 없고, 남편의 작업실 월세와 공과금을 내면 생활비가 그리 많이 들진 않는다. 지금 지내는 집에서 나가라고 하면 분명히 더 변두리로 가야겠지. 가끔 불편하고 불안도 생기고 어떨 땐 씁쓸하고 비참하기도 하지만, 나는 잘 지내고 있다. 심지어 행복하게. 

우리의 삶에 가장 큰 도움을 주는 이는 엄마다. 뭘 해 먹는지 늘 궁금해하고 친정에 갈 때마다 빈손으로 돌려보낸 적이 없다. 김치는 기본이고 온갖 밑반찬을 싸주신다. 어려서는 시큰둥하게 먹었던 그 밑반찬들이 지금은 얼마나 소중한 식탁 구성원이 되었는지. 엄마의 고마움에 어떻게든 보답을 하고 싶지만 명절이나 행사 때만 겨우 쥐어드리는 10만 원짜리 돈 봉투가 전부다. 그래도 엄마는 그 적은 돈을 참 기쁘게 받아준다. 

엄마는 아직도 나 때문에 속이 상할까. 남편은 여전히 큰돈은 벌지 못하지만 성실하게 일하고 성실하게 작업한다. 소위 '한 방'을 내기 힘든 분야의 음악을 하고 있어서 앞으로도 이 생활이 얼마나 길게 이어질지 모른다. 그냥 이게 우리의, 나의 삶이다. 우리는 임시로 이렇게 사는 게 아니고, 그냥 이런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그래도 엄마는 계속 나를 좋아해 줄까. 엄마가 바라는 '한 방'이 없어도, 끝까지 아기를 낳지 않겠다고 해도. 외롭게 죽을 삶을 예정해 놓아도. 엄마의 마음속에서는 지금도 싸움이 일어나고 있을까. 

엄마의 마음이 궁금하지만 궁금하지 않다. 엄마는 행동으로 나를 지지해 준다. 그걸로 충분하지 않은가. 가끔 못 참은 잔소리와 궁금증이 올라와 한 마디씩 나를 괴롭힐 때도 있지만 그 정도는 엄마와 딸이니까 감수할 수 있다. 돌아서면 잊는다. 그보다 나는 딸로서, 엄마의 삶이 진전되기를 바란다. 자녀에 대한 독립과 이해가 첫 번째였다면 이 사회 속 다른 이들에 대한 이해, 또 엄마 자신에 대한 도전과 용기가 엄마 마음속에 자리잡기를 바란다. 분명 엄마의 마음에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넓은 공간이 있고 오랜 시간 동안 다져온 근육이 있을 것이다. 다만 나와 엄마의 범위가 다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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