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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Dec 20. 2018

메모리와 그리스 신화적 용량 전쟁

데스크탑을 사용할 때는 하드 용량 증설이 아주 수월한 편이라 용량이 모자라다고 느낀 적이 거의 없었는데, 노트북으로, 그리고 맥북 에어로 옮겨오면서 혹독한 고통을 느끼게 되었다. 서커스처럼 몸을 차츰 더 작은 상자에 구겨넣는 기분이다. 물론 서커스 단원은 충분한 노력과 훈련을 거치는 반면에 나는 훈련이고 뭐고 없이 박스 속으로 내던져지는 것이니까 조금 다르지만……. 


아무튼 지금 사용중인 맥북 에어는 128기가인데, 한국에서 윈도우즈를 쓰지 않을 수도 없어서 윈도우즈까지 설치했더니 처음엔 20기가도 하지 않았던 것이 악성 종양처럼 덩치를 불려 이제는 50기가에 달하게 되었다. 물론 맥 OS도 자기 나름의 용량을 필요로 하는데다, 각종 애플리케이션과 데이터도 자리를 차지하니 128기가 따위가 남아날 턱이 없다. 


그리하여 2주에서 3주에 한 번쯤 용량이 부족하다는 경고가 뜨고 있는데, 이 문제를 처리하기가 여간 골치 아픈 것이 아니다. 옛날처럼 영화 따위를 보기 위해서 일일이 다운 받아 저장하는 시대도 아닌데 대체 무슨 공간을 그렇게 많이 먹는단 말인가? 그래서 사용량을 찾아보면 십중팔구는 윈도우즈 용량이 더 커진 것이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을 지경이라 검색해보니, 윈도우즈는 제멋대로 업데이트를 진행해서 프로세스를 느리게 할 뿐만 아니라(필요할 때만 켜는데, 켜면 꼭 업데이트를 한다) 당장은 필요 없을 예전 업데이트도 소중한 추억처럼 간직하는 버릇이 있어서 점점 커질 수밖에 없다고 한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복구하기 위해 필요한 부분이라곤 하지만, 발생할지 안 할지도 모르는 문제 해결 때문에 맥북 사용 자체가 힘들어지니 이건 본말전도다. 그리하여 윈도우즈가 보관한 소중한 업데이트의 추억들을 가차없이 빼앗아 폐기처분하고 각종 캐시를 날려버림으로써 맥북 세계에 평화를 되찾는데, 이 짓을 몇 번이고 반복하다 보면 영원히 끝나지 않는 제설 작업을 하는 기분이라 영 기분이 좋지 않다. 


그런데 더 끔찍한 것은 이런 제설 작업이 맥북으로 끝이 아니라는 점이다. 아이폰 6s 64기가를 쓸 때는 그야말로 아무 문제도 없었는데, 화웨이 P9 32기가로 옮겨오면서 대재앙을 겪게 되었다. 물론 나도 맹추는 아닌지라 32기가만으로 살 수는 없을 거라 예상하고 64기가 SD 메모리를 추가했는데, 어처구니 없게도 앱 자체는 SD 카드에 설치할 수 없단다. 괜찮은 앱이나 게임이 있으면 한 번씩 깔아보는 습관이 있는 나로서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다. 결국 앱 데이터만 이동시키고 당장 쓰지 않는 앱을 싸그리 정리함으로써 간신히 숨은 쉴 수 있을 정도가 되긴 했지만, 이번에는 구글 크롬이 700메가로 불어나는 등 기상천외한 일이 일어나서 끔찍하기 짝이 없는 용량 전쟁을 벌여야 했다. 정말이지 용량 증설에 제약이 있다는 건 막상 안드로이드 폰을 쓰기 전에는 어디서도 듣지 못한 소리라 사기당한 기분마저 든다. 


데스크탑을 쓰지 않으면  금방 어떤 벽에 부딪치게 되어 있다


아무튼 분명 세상의 IT기술은 눈부시게 발전을 거듭해서 어마어마한 용량이 손톱만한 칩에 다 들어가게 되었는데 어째서 나는 갈수록 쪼들리는가? 심지어 대부분의 콘텐츠는 저장할 필요도 없게 되었는데?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일단은 내가 충분한 돈을 쓰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기기 제조사가 적절한 옵션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렇게까지 사양이 뛰어난 노트북도 필요 없고 엄청나게 얇고 아름다운 스마트폰도 필요 없으니 뭐든 싼 값에 용량 크고 튼튼하고 배터리 오래 가는 기기면 돼’ 라고 생각해봤자 그런 기기는 아무도 만들어주지 않는 것이다. 최첨단 기술로 몹시 슬림하고 아름다운 일체형 기기를 만들어서 입맛대로 바꿀 수도 없게 만들면서, 모든 사양을 세트로 묶어서 판매한다. 용량이 크면 나머지도 다 고급이라 도저히 넘볼 수 없는 가격이 되는 것이다. 예산이 넉넉한 사람이야 고민할 것이 없어서 편하겠지만, 바위에 맺힌 이슬을 핥아먹는 식으로 연명하는 입장에선 이것저것 따지고 따진 끝에 사용 패턴과 묘하게 맞지 않는 기기를 쓰면서 여기저기를 계속해서 누덕누덕 기워서 쓰게 되는 법이다. 


제조사 욕은 이쯤 하기로 하고, 용량이 부족한 이유 중 또 한가지는 개인이 만들어내는 데이터의 양이 대단히 커졌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카메라가 발전해서 4k 동영상을 아무렇지 않게 찍을 수 있게 된 데다, 20메가 짜리 사진도 척척 찍게 되었다. 한 장 20메가라고 하면 대단치 않은 것 같지만, 이런 것을 50장만 찍어도 순식간에 용량 부족에 허덕이게 된다. 더 큰 집으로 이사가는 건 엄청나게 힘든데 시도때도 없이 사과박스만한 택배 박스가 날아와서 쌓이는 격이다.  


그래도 그나마 사진 저장은 구글 포토를 백업 수단으로 삼으면 어떻게 해결이 되긴 한다. 리사이즈를 하긴 하지만 그다지 티나지 않게 하면서 무제한 저장을 지원해주기에 작품 사진을 저장할 게 아닌 이상 그럭저럭 만족할 만하다. 그러나 솔직히 ‘사진을 무료로 무제한 저장하세요!’ 라는 이 서비스 조건 자체가 영 미심쩍은 구석도 있고, 사람들 잘 쓰던 서비스를 대뜸 때려치운 구글의 전적을 생각해보면 구글 포토 역시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어 불안해진다. 


결국 데이터 저장은 역시 하드를 이용할 수밖에 없나 싶은데, 어째 하드라는 것도 별로 안정적인 매체가 아니라 10년 20년 보관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단다. 주로 쓰는 기기를 바꿔버리면서 저장매체도 변경하는 게 안정적인 사용 방식인 모양이다. 아니, 그렇다면 대체 안정적인 저장이 가능한 매체가 점토판 말고 있긴 있나? 


찾아보니 있긴 있었다. 테이프 드라이브라고 불리는, 먼 옛날 영화 속 매드 사이언티스트의 연구실 배경에서 돌아가는 대형 비디오 테이프 같은 그 물건이 아직도 쓰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낡은 기술이 아직 유용한가 싶은데, 의외로 이게 아주 안정적이고 저렴하며 속도도 빠르단다. 여기저기 나뉜 데이터를 읽어오려면 테이프를 이리저리 감아야 한다는 문제는 있지만 단순 저장 보관에는 유리할 뿐더러 가격도 저렴하다는 설명이다. 그리하여 나도 언젠가는 이런 걸 쓰게 되는 게 아닐까 싶어 알아보니…... 이 매체를 사용하는데 필요한 드라이브가 백만원 돈이었다. 이야깃거리로는 재미있을지 모르나 나와는 실질적으로 연이 없는 물건인 셈이다. 옛날 기술이라고 얕볼 일이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이래저래 고생만 하고 뾰족한 해결책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셈인데, 동영상 시대가 되어 사람들이 생산하는 데이터의 용량이 엄청나게 늘어났고 앞으로도 늘어날 것이므로 몇 년 안에 획기적이며 합리적인 가격의 저장 매체나 서비스가 등장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물론 그때까지는 시련을 받는 그리스 신화 속 영웅처럼 끊임없는 제설작업을 하는 수밖에 없지만….... 요는 선명한 기억을 큰 수고 없이 보유하는 것도 건강한 재정구조 없이는 쉽지 않은 일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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