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욕이라면 지나치게 없는 게 문제가 아닌가 싶은 나였지만, 유독 책 욕심만은 통제가 되지 않았다. 아니 통제하고 싶지 않았다. 한 번 볼 책이면 도서관에서 빌려보면 되지 않느냐지만 그럴 수 없었다. 꽂히는 구절에 줄도 쫙쫙 그어가면서 떠오르는 생각도 여기저기 적어가면서 거침없이 읽어가는 그 맛을 포기할 수 없었다. 한동안 그야말로 닥치는 대로 사들였던 것 같다. 당시 내 책 구매의 기준은 ‘한 단어라도 건질 게 있어 보이면 일단 산다.’였으니까.
그렇게 사들인 책들을 다 읽기는 했을까? 열심히 읽기는 했다. 한 번 책을 잡으면 웬만해선 놓지를 못 했다. ‘이 책만 읽고 나면, 이 책만 다 읽고 나면 이 지긋지긋한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답답한 일상 속에서 책은 내게 유일한 '희망'이었다.
혹시라도 읽어야 할 책을 놓쳤기 때문에 내 삶이 충분히 행복하지 않은 것이라면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기억도 있다. 최소한 '최선'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렇게 15년을 정말 미친 듯이 읽어 댔다. 아이를 낳고 나서 시간이 부족해지자 책 읽을 시간을 더 확보하기 위해 육아휴직도 모자라 퇴직까지 했다면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그래서 나는 더 행복해졌을까? 결론적으로는 그렇다. 그런데, 그게 말이다. 어이없게도 '이제 좀 살만하네.'하고 느끼기 시작한 것은 책을 읽어가는 과정이 아니라 비워가는 과정을 통해서였다.
작년 봄이었다. 분명히 읽은 기억이 나는데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가 않는 책이 있다. 하는 수 없이 책을 다시 주문해 받아 들고 무심코 책장을 쳐다보다 방금 도착한 책을 발견했다. 여기까지는 그럴 수도 있다 친다. 처음도 아니었다. 낭패감을 애써 외면하며 책을 펼쳐 읽다 역시 무심코 고개를 들어 시선이 머문 곳에 낯익은 표지가 보인다. 또 같은 책이다.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어찌 이 책 뿐이랴. 가도 가도 같은 곳으로 되돌아오고 마는 미로 속에 갇힌 기분이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다.
그럼에도 처음엔 책을 비울 작정까지 했던 것은 아니었다. 아니 그런 맘을 먹어보기는 했다. 하지만 책을 버린다고 생각하니까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팔다리가 짤려 나가는 느낌이 들어 자꾸만 미루고 싶고 피하고 싶기만 한 거다. 그래서 목표를 수정했다.
나는 단지 집에 있는 책의 재고파악을 하고 싶을 뿐이다. 무엇을 가졌는지 알고,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무엇이 불필요한지 아는것. 이것이 재고관리다.
그리고 나니 맘이 좀 편해져 책들을 살펴볼 엄두가 났다. 그런데 그렇게 멈추어 살피기 시작하니 보이는 거다. 다시는 펼쳐보지 않을 책들이. 주로 '나만 따라하면 순식간에 대박인생을 맞을 수 있을거야!'류의 책들이었다. 지금이라면 절대 사지 않을 책들. 무.지. 많았다. 그 책들을 골라내고 나니 이번엔 결국은 같은 이야기들의 반복인 책들이 눈에 들어왔다. 모아 놓으니 베스트는 저절로 떠올랐다. 마치 매직 아이처럼. 나머지엔 미련이 없어졌다. 책을 추려내는데 가속이 붙기 시작했다.
추려둔 책은 상태에 따라 중고판매, 아름다운 가게 기부로 선별해서 처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중고서점으로 처음 보냈던 20권 중 16권이 폐기되었다는 통보를 받았다. 5페이지 이상 밑줄이 그어진 책은 상품 가치가 없다나. 혹시나 싶어 아름다운 가게에 가져가 보았으나 거기서도 역시 같은 대답을 들었다. 그러니까 나처럼 거침없는 독서가의 손을 탄 책들은 중고매매는 물론 기부도 안 된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이미 마음에서 떠난 책들을 다시 끼고 살 수는 없었다. 한 권도 못 비운다며 벌벌 떨 때는 언제고, 사람 마음이란 것이 이런 거구나. 결국 50킬로가 넘는 책들은 킬로당 500원씩 쳐준다는 헌책수거 업체가 수거해갔다.
그리고 나니 비로소 사놓고 한 페이지도 읽은 기억이 없는 책들을 건드릴 용기를 낼 수 있었다. 대개 베개로 써도 손색없을 만큼 두껍고 무겁고 어려운 책들이었다. 소위 ‘라면 박스’ 사이즈로 무려 4박스가 나왔다. 서점 책장에서 우리집 책장으로 장소만 옮겨 꽂아두었을 뿐인데 판매가는 사들인 가격의 십분의 일 수준. 아까운 마음에 다시 책장을 펼쳐 봤으나 읽고 싶은 마음은 1도 들지 않았다. 그동안의 비움이 만들어 낸 공간이 주는 명료함인 듯 했다.
비록 폐지 취급을 받긴 했지만 읽은 책들은 어디라도 도움이 되었을 텐데 대체 이 아이들은 무엇이었단 말인가? 나도 모르게 스스로를 쥐어박으려던 바로 그 때였다. 어쩌면 이 많은 책들이 내게 왔던 것은 바로 이 순간을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던 대로 살면 안 되겠다는 것은 분명한데 어찌 살아야 할지 감도 잡을 수 없어 막막하던 오랜 시간 동안 책은 내게 친구였고, 연인이었고, 든든한 부모였으며, 외로운 날 속을 뜨끈하게 데워준 한 그릇의 설렁탕이자, 헛헛한 맘 달랠 길 없던 순간 적당한 달달함으로 나를 위로해 준 한 잔의 커피였다. 심지어는 읽지 않고 쌓아만 둔 어려운 책들마저도 내용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로 자신들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주었다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내게 왔던 모든 책들은 그 순간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었던 거다. 그렇게라도 살아내 준 스스로가 진심으로 사랑스럽고 대견했다. 그 시간을 함께 해준, 내게 와준 모든 책들이 고맙고 고마웠다. 이 고마운 존재들에게 감히 '좋은, 나쁜'의 따위의 수식어를 붙이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그 책들의 저자들 역시 꼭 나처럼 자신들에게 꼭 필요한 시기를 꼭 필요한 방식으로 살아냈던 존재들 아니겠는가.
하지만 그래도 지금이라면 읽지 않을 책들에 쏟은 시간과 에너지가 아깝진 않냐고? 그 책들 때문에 빛나는 삶을 축낸 것이 속상하진 않냐고? 그런 맘이 안 들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이내 받아들여졌다. 그건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에게 한 번도 넘어지지 않고 바로 걷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은 욕심이라는 것을. 숱하게 넘어지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근육 덕에 오늘의 걸음걸이가 이토록 안정될 수 있었다는 것도.
보조바퀴 덕에 보조바퀴 없이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되어놓고 보조바퀴가 쓸 모 없는 낭비였다고 말해서야 되겠는가? 그러니 이게 고마워할 일이지. 어찌 타박하거나 후회할 일이겠는가? 그렇게 마치 작아져 더 이상 입을 수 없는 어린 시절의 옷들과 이별하듯 마음을 다해 감사하며 책들을 보낼 수 있었다.
남은 책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고 보니 그 모습이 마치 나라는 존재의 단면도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여전히 내게 울림을 주는 책들에는 공통적으로 관통하는 키워드가 있다는 것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키워드가 바로 '살림'이다. 내가 그토록 오래 책에 매달렸던 것은 나를 이루는 몸, 공간, 관계, 돈을 살피어 살림으로써 시들어가는 나 자신을 살려내고 싶은 열망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자 그것이 몸이든, 공간이든, 관계든, 돈이든 혹은 이것을 넘어서는 그 어떤 것이든 모든 시들어가는 생명을 '살려내기' 위해서는 공통적인 프로세스를 거쳐야 한다는 것도 분명히 보이기 시작했다. 이는 다시 말해 한 생명을 살려내는 체험이야말로 온 생명을 살려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가능성이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때였다. 좋던 싫던 매일매일 할 수 밖에 없는 바로 그것, '살림'이 떠올랐다. 생명을 잉태하고 키워내고 살려내는 그 일을 나는 이미 매 순간하고 있었던 거다. 그 엄청난 현장과 경험을 가진 존재가 남의 삶을 기웃거리느라 바빠 정작 가장 중요한 자기 삶을 들여다 볼 여유를 낼 수 없었던 것이 내가 15년(제대로 읽기 시작한 시기부터 냉정히 따져도 오롯이 10년)이나 헤매 다녀야 했던 근본적인 원인이었음이 너무나 선명하게 온 몸으로 느껴졌다.
그럼 나는 결국 책을 읽지 말아야 했던 걸까? 그렇지 않다. 동서고금의 인생선배들이 이미 다져 놓은 기반을 다 버리고 맨 땅에서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은 곧 하늘을 나는 자동차가 나올지도 모르는 세상에서 '자전거'를 발명하겠다고 온 삶을 다 바치는 것 만큼이나 가여운 것 일 테니까.
그러니 읽긴 읽되 책은 어디까지나 '참고서'일 뿐이며, 우리가 정말로 제대로 읽어야 할 책은 '삶, 그 자체'라는 것을 늘 기억해야 한다. 책을 읽느라 삶을 놓치는 어리석음을 늘 경계해야 한다.
그렇다면 살림의 현장을 갖고 있는 존재에게 필요한 것은 이미 넘치게 갖고 있고, 하고 있는 '살림'의 체험들을 우리 자신을 비롯해, 우리가 정말로 살려내고 싶은 존재들을 '살려 내는데’ 활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몇 권의 책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내가 그런 책을 쓸 수는 없더라도 이미 세상에 나와 있는 좋은 책들을 선별해 자신의 현장과 함께 꾹꾹 눌러 깊이 읽어갈 수 있다면 삶은 또 얼마나 아름다워질까? 바로 이거다! 내가 나를 살리기 위해 남은 시간 할 수 있는 유일한 일. 나를 살림으로써 사랑하는 존재들을 살려낼 수 있는 내게 허락된 단 하나의 길.
그렇게 너무 많아 어지럽기만 하던 책 안의 ‘위대한 길’들과 너무나 평범해서 하찮고 보잘 것 없게만 느껴지던 ‘찌질한 현장’ 사이에서 오직 나를 위한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