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품어본 엄마는 안다.
이유없이 떼쓰는 아이는 없다는 것을
우리가 대개의 경우, 어제의 인간으로 남아 오늘을 다시 시작하는 이유는
생활의 불편을 감수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관성과 같다.
움직이지 않는 물체는 그대로 있으려고 한다.
그러나 일단 구르기 시작하면, 계속 구르려고 한다.
정지상태와 운동상태의 사이에는 단절이 있다.
이 단절을 넘어설 때 우리는 다른 삶을 살 수 있다.
이 단절은 뿌리 깊은 ‘정지하고 싶은’ 관성을 극복함을 의미한다.
일상이 주는 ‘무위’의 편안함이 없다.
모든 것이 새롭고 낯설다.
배워야 하고 부지런해야 한다.
더욱 참기 힘든 것은 매일 그래야 한다는 점이다.
‘작심삼일’이라는 말은익숙한 생활의 패턴을 벗어나기가
누구에게나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증명하는 경구다.
우리가 변화를 두려워하는 것은 바라지 않아서가 아니라
익숙한 생활이 주는 기득권을 잃어버릴까 봐 두려워서이며
일상생활의 편안함을 놓치기 싫어서다.
- 구본형의 <익숙한 것과의 결별> 중에서
그리 절실해 시작한 변화이면서도 자꾸만 머뭇거리는 제 자신이 답답하고 못마땅했습니다.
이대로는 못살겠다며 뭐라도 시작하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날 듯 안달을 하던 저는
어느새 마치 이 길 위의 모든 것을 다 알기라도 한 양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그렇게까지' 를 연발하며 도리질해대고 있는 겁니다.
이것은 '포기'가 아니라 '조화와 균형'이라며 그럴 듯 둘러댔지만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조화와 균형'이
저 자신을 더이상 견딜 수 없는 지경까지 방치하도록 부추켰던 명분이었다는 것을요.
깜짝 놀라 저를 몰아댔습니다.
다시 첫마음으로 변화를 이어나가야한다고 타이르고 구스르다 윽박지르며 다그쳐댔습니다.
그러면 그럴 수록 자꾸만 더 허둥대며 엇박자를 내기가 일쑤였습니다.
'어쩔거야. 나란 인간. 그만 둘 수도 계속 갈 수도 없으니 이제 도대체 어쩌면 좋으냐구?'
한참을 그리 부대끼다가 알게 되었습니다.
두려움이란 떼쓰는 어린 아이와 같아서 화를 내고 다그치는 방식으로는 달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무작정 아이가 하자는 대로 끌려다녀서도 안 됩니다.
아무리 급해도 하던 일을 멈추고 아이와 눈맞추고 아이의 이야기를 찬찬히 들어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아이를 품어본 적이 있는 엄마들은 압니다.
이유없이 떼쓰는 아이는 없다는 것을.
또 그것이 어떤 이유라도 엄마의 품안에서 스스르 녹아내리기 마련이라는 것을.
아이에게 가장 근본적인 두려움은 자신을 무조건적으로 품어주는 엄마의 품을 잃는 것일테니까요.
시작한 것을 마무리하지 못하는 스스로가 불편하시다구요?
그 불편함이 불편해 모험을 시작할 엄두가 안나신다구요?
그렇다면 오늘은 잠시 멈춰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면 어떨까요?
'나는 무엇을 두려워 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