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우리는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상처받고 있었는지도

나보다 '여권'이 더 중요하다는 거지?

by 아난다


보낸사람 : Jin 11.08.21 00:27


우리는 배려라는 말을 흔히 쓰지. 참 어디까지 배려로 봐야할지 판단이 안 서는 경우가 많지. 이때 左右腦는 열심히 생각하겠지. 右腦의 입장에서 여기까지가 큰틀에서 배려라고 생각하겠지. 그러면 右腦가 내린 판단에 대해 左腦는 다시 열심히 세부 계획을 짜겠지. 어디까지 해야할까. 이것까지 하면 세심하다는 얘기를 들을까 고민을 하겠지. 그러나 너무 左腦까지 세세하게 작용하기를 바라는 것은 좀 그렇다는 생각이 들어. ‘큰 틀’에서 생각해주면 좋겠어.


여권을 두고 온건 순전히 내실수야.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 그래도 별일 없이 갔다 올 수 있어서 다행이야. 하지만 여유를 두고 받아오라고 하면 내가 여행 전날까지 안 가지고 왔겠어? 여유를 가지고 부탁하는 것도 한 방편이지. 이것도 시키는 사람의 배려 아닐까?


나는 가끔 단어에 대해 이중적으로 생각해 볼 때가 있어. 이렇게 하면 논리적으로는 별무리가 없는 변명이 되는 것 같아. 양보가 미덕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지만 도저히 양보하고 싶지 않을 때 양보를 양보하기로 마음먹는 거야. 양보라고 양보를 못할 것도 없잖아. 이건 그냥 재미있게 들으라고 하는 소리야.


그러면 배려에 대한 배려는 없는 것일까? 배려받고 싶을 때 어떤 식으로 어디까지 배려받을 것인지 고민하자는 얘기지. 단지 배려만 받으려고 하다보면 너무나 섭섭해질 일이 많을 것 같아서. 나도 이 문제에 대해 깊게 생각해보지만 역시 어려운 것 같애. 배려 받는데까지 신경써야 하고. 너무나 힘들어지지. 그래도 필요는 한 거 같아. 나도 여기에 대해서 열심히 생각하고 노력해야지.


주절주절 쓰다보니 정작 당신의 질문에는 대답도 못했네. 본격적인 대답은 월요일까지로 미뤄도 될까? 영이가 깨서 아빠 빨리 오라고 부르고 있거든.


보낸사람 : 미옥 11.08.22 13:41


우리가 만난 이후 지금껏 나눈 대화중 가장 심오한 대화! 솔직히 당신이랑 이런 대화를 나누게 될 줄은 정말 몰랐어. 나로선 엄청나게 반가운 일이기도 하구. 내가 당신에게 느끼던 갈증 중 하나가 대화의 차원이 ‘객관적인 정보 교환’ 수준을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이었는데..그러고 보면 참 어이없는 오해였네. 당신, 원래 이렇게나 심오한 인격체였던 거야? ^^


여행 당일 아침, 당신 얼굴 보자마자 여권부터 묻고는 두고 왔다고 하자 두말도 없이 얼른 여권이나 가져오라고 정색을 했어. 그러자 현관문을 나서며 당신이 중얼거렸지.


“그러니까 나보다 여권이 더 중요하다는 거지?”


그날 당신을 보내놓고 한참을 웃었어. 어쩌다 이렇게 역할이 뒤바뀌게 되었지? 하면서 말야. 근데 당신의 메일을 받고 생각해보니 이건 단순히 입장이 바뀐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우리는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상처받고 있었는지도모른다는.


내내 퉁퉁 부어있다. 계속 툴툴거린다. 아무리 고마워도 이건 좀 아니다 싶다. 크게 보면 고맙기 그지 없는데 작은 것들이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이런 사소한 차이쯤은 그냥 넘어갈 수 있으면 좋을텐데.. 머리는 참으라하는데 마음이 자꾸만 욱하고 치밀어오른다. 참..인간이란 다루기 힘든 존재임에 틀림없다. 내가 나를 봐도 그렇다. 대체 내 욕심의 끝은 어디란 말인가?

남편이 문제라기 보다는 내가 문제인 것 같다. 9번 이뻐하다가 1번 뭐라고 하면 그게 그렇게 섭섭해서 난리다. 9번 칭찬받은 건 내가 잘 했으니 당연하고 1번 싫은 소린 들은 건 내가 아무리 잘못했더라도 그것도 못 품어주는 남편이 나쁘다는 논리다. 진짜 뻔뻔스러운 거 아닌가? 근데..이렇게 다 알면서도 막상 상황이 벌어지면 또 똑같아지고 만다. 대체 어떤 수련을 해야 이 모순에서 벗어날 수 있어지려나?

2010.10.20


당신도 나랑 마찬가지였던 거구나. 난 늘 화난 듯 보이는 당신이 견디기 힘들다고 투덜댔었는데, 그러고 보면 나도 만만치 않았어. 내가 당신을 위해, 또 가족을 위해 애쓰는 것은 하나도 알아주지 않고 작은 실수만을 다그치는 당신이 야속하게만 느껴졌었는데 당신도 꼭 나만큼이나 섭섭해하고 있었던 거구나.


당신말이 맞아. 큰 틀에서 보면 우린 서로에게 ‘존재’ 자체만으로도 이미 넘치도록 큰 선물을 하고 있는 셈인데 왜 이렇게 자주 깜빡거리는 건지. 감사하는 만큼 삶이 풍요로워진다는 걸 너무나 잘 알면서 유독 당신에게만큼은 왜 이렇게 인색하게 구는 건지.


쓰다보니 답이 떠 오른다. 그래. 우린 서로에게 너무 많은 기대를 갖고 있어서일 거야. 다시 화제가 원점으로 돌아오네. 우리는 서로에게 무엇을 기대하는가? 이건 역시 각자가 ‘사랑’을 어떻게 정의하는지와 맞물려 있는 문제이고. 어긋난 기대가 갈등을 부른다면 이를 어떻게 조절하는 게 현명한지가 당신이 마지막 질문인 거고. 결국 이야기를 더 진행시키려면 당신의 답안을 기다려야겠지?


이미지 출처 : 폴란드 현대미술작가 Wilhelm Sasnal https://pin.it/5yeyy6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