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해서 결혼했다고?

결혼하기 위해 사랑했던 건 절대 아니고?

by 아난다

보낸사람: "미옥" 11.08.22 18시 55분 22초



메일을 보내놓고 보니 좀 치사한 것 같아 다시 노트북을 열었어. 지금까지 1년반이 넘도록 꼬박 연구에만 몰두해 온 내가 일하면서 틈틈이 메일을 보낼 수 밖에 없는 당신과 동등한 분량의 이메일 대화를 나누려고 하다니. 아무래도 불공정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야. 그래서 당신과의 이메일 릴레이 사이사이에 그간의 탐구결과를 당신과 공유해볼까 해. 그 탐구의 과정과 결과가 숙성되어 지금의 나를 이루고 있을 테니까 당신이 박미옥이라는 인간을 입체적으로 파악하는데도 훨씬 더 도움이 되지 않겠어? 어차피 우리가 하고 있는 이 작업의 궁극적 목적은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하는데 있는 거니까.




우리는 왜 결혼했을까?



뜬금없나? 물론 ‘사랑하니까’라는 대답 하나면 다 해결되는 질문이라는 건 알아. 그치만 정말 그게 다였을까? 당신 생각나? 우리가 만난 지 3주쯤 되었을 무렵이었나? 첫눈에 서로를 알아본 우리는 그때 이미 ‘사귀는’ 사이로 발전해있었고. 새로 시작하는 연인들답게 한참 알콩달콩 달콤한 시간을 보내는데 누군가 당신에게 전화를 걸어왔어. 전화기를 들고 자리를 피하는 당신의 표정을 보며 나는 딱 감을 잡았지. ‘여자구나!’ 한참만에 자리로 돌아온 당신은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이야기를 이어나가려고 했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었겠어? 당연히 물었지. 무슨 전화냐고.



아무 것도 아니라며 둘러대는 당신을 보니 점점 더 수상해지는 거야. 집요한 추궁 끝에 결국 밝혀진 진실. 역시 여자였어. 약속했던 소개팅을 언제쯤 하는 것이 좋겠냐는 용건이었지만. 당신이랑 결혼해야겠다고 이미 마음을 정하고 있었던 나로서는 당연히 어쩌면 그럴 수 있냐고 펄펄 뛰었지. 당신은 미리 잡아놓은 약속이었는데 어쩌다보니 아직까지 취소를 못했던 것 뿐이라며 진땀을 흘리며 나를 달래야했지.



근데 당신, 이건 몰랐지? 사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 역시 당신을 만나기도 전에 이미 다음 소개팅 약속을 잡아놓고 있었고, 당신정도면 결혼해도 되겠다고 생각하면서도 혹시나 싶어 그 약속을 깨지 않고 있었던 거지. 아! 물론 당신과의 그 일이 있던 날 헤어져 돌아오는 길에 바로 전화해 안하겠다고 말하긴 했지만.



내가 굳이 지나간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우리가 ‘왜’ 결혼했는지를 좀 더 본질적으로 파헤쳐보기 위해서야. 그러니까 그때 우리는 둘 다 ‘결혼’을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는 거지. 바로 그 노력의 결과로 원하던 ‘결혼’을 할 수 있었구. 다시 말해 우리는 사랑해서 결혼했다기보다는 결혼하기 위해 사랑했던 것 아닐까? 그러니 혹시나 그날 만남에서 서로를 만족시키지 못했다면 우리는 아마 각각 결혼상대를 찾기 위해 비슷한 만남을 계속해 나갔겠지.



그럼 다시 물을게. 당신은 왜 그렇게 ‘결혼’이 하고 싶었어? 어렵다구? 그럼 내가 먼저 대답해볼까? 솔직히 나는 ‘왜’라는 질문을 해본 적이 없네. 그냥 남들 다 하니까. 그리고 다들 그래야 된다고 하니까. 그때만 해도 우리 사회분위기가 그랬잖아. 나이 되었는데 결혼 안하고 있으면 왠지 어딘가 하자 있어 보이고 그러는 거. 짝이 없다는 이유로 엄벙덤벙 아무나랑 엮이는 것도 자존심 상하기도 했고. 게다가 당신도 알다시피 그때 우리 아빠가 많이 아프셨잖아. 왠지 마음이 조급해지더라. 그래서 혼자 약속했지. 무슨 일이 있어도 서른을 넘기지 않으리라.



운이 좋았는지, 운명이었는지 나는 나와의 약속을 지킬 수 있었지. 하지만 내가 결혼을 통해 행복을 느끼기 시작한 건 우리가 결혼하고도 한참이 지난 작년부터였지. 물론 그렇다고 내내 불행했다고 말하고 있는 건 아냐. 집을 사고, 아이 둘을 낳고, 해외연수를 다녀오고, 승진하고...그런 저런 사회적 스케줄을 숨가쁘게 따라가느라 행복한지 불행한지를 가늠해볼 여유조차 없었던 거지. 뭔가 무지 힘들긴 한데 다들 그렇게 살고 있는 걸 보면 점점 나아지는 걸 테지. 그렇게 막연한 희망이라는 진통제를 맞아가며 하루하루를 버텼던 셈. 시간이 갈수록 그 진통제의 약발도 점점 희미해져갔고.



원하는, 아니 원한다고 믿었던 일들이 하나둘씩 현실이 되어갔지만 기대했던 ‘행복감’의 물결은 밀려오지 않았어. 새집에 들어간 지 한달도 채 되지 않아 더 큰 집이 탐나기 시작했고, 그럭저럭 무난한 조직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나보다 더 잘 나가는 동료의 행운에 배가 아파 잠을 잘 수 없었지. 당신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는지도 몰라.



나는 ‘완벽한’ 결혼을 갖고 싶었어. 홈드라마에 나오는 것 같은 단란하고 사랑넘치는 그런 가족말야. 구할 수만 있다면 억만금을 주고라도 ‘스위트 홈’ 소프트웨어를 사다 우리 가족에게 설치하고 싶었어. 모든 사람에게나 범용되는 ‘행복’의 원형이라는 게 있다고 믿었던 거지. 그 과정에서 당신이랑 부딪히고 또 부딛혔지. 그때마다 나의 자존심은 끊임없이 상처입었구.



그때쯤 도저히 타협할 수 없었던 나는 자기기만이라는 새로운 방법으로 나의 판타지를 고수해 나가기로 결정했던 것 같아. 삼사년간의 경험으로 당신에 대한 지식이 조금 늘어나면서 어디를 피해야하고 어디를 자극해야하는지에 대한 감이 생겼던 거야. 당신은 내게 고장난 피아노였어. 남들에게 고장난 부분을 들키지 않으려면 그 음을 뺀 곡을 골라 연주하고, 원래부터 그 음악이 내가 추구하던 거였다고 우기면 그만이라구 생각했지. 하지만 그 모든 것은 과연 누구를 위한 퍼포먼스였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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