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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없게도 결론은 몸이었다

내 몸 하나 마음먹은 대로 관리하지 못하면서

by 아난다
큰 아이를 임신하고 있을 무렵 첫 번째 승진 발표가 있었다. 임신 때문에 승진에서 누락될 수 없다며 독을 품고 근무했다. 착실히 실적을 쌓고 어떤 부조리도 웃으며 참아 넘겼다. 하지만 승진은 나를 비껴갔다. 그때 알았다. 처음부터 결과는 정해져 있었구나. 내가 아무리 잘했다고 해도 나를 위한 자리는 처음부터 없었던 거구나. 억울했다. 1년차에 승진하는 여직원이 드물다는 것을 몰랐던 건 아니었지만 막상 현실로 다가오니 이건 또 다른 문제였다.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어떻게 해서든 그들이 실수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출산 후 다이어트에 매달렸던 것도 오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전에 하던 다이어트와는 성격이 달랐다. 단순히 ‘美’에 대한 추구를 넘어선 승부였다. 승진에서 누락한 후 몇 개월을 끊임없이 「내가 모자란 것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았다. 어이없게도 결론은 몸이었다.

나를 여자로 인식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내내 몸이 콤플렉스였다. 당연히 나는 항상 다이어트 중이었고, “다이어트에 성공만하면”을 입버릇처럼 달고 다니며 본격적인 삶은 언제나 다이어트 이후로 미뤄두고 있었다. 또래들이 한참 저마다의 짝을 찾아다니느라 열중하던 무렵에도 멀찌감치 떨어져 관찰자의 입장을 고수하려 들었던 것도 아마 이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런 근본적인 열등감에도 불구하고 내 삶은 그럭저럭 세상의 보조에 맞춰 진행되긴 했다. 하지만 저 깊은 곳에는 늘 ‘내가 조금만 더 예뻤더라면 훨씬 나은 결과가 있었을텐데..’하는 아쉬움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밝은 척 웃고 다녔지만 그 웃음으로 주어진 나를 최적화하지 못하고 삶을 낭비하고 있는 스스로에 대한 불만까지 지울 수는 없었던 것이다.

조직에서의 좌절감은 이런 나의 숨은 불씨에 기름을 부었던 셈이었다. 나 스스로에게도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면서 다른 누구한테 대접받기를 바란다는 게 어이없었다. 내 몸 하나 마음먹은 대로 관리하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들 원망만 하고 있는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내 자신에 대한 존경심을 회복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이렇게 생각하고 보니 승진 등 일터에서의 수혜는 오히려 부차적인 것으로 느껴졌다.

다이어트는 출산한지 50일째 되는 날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몸은 아직 회복이 덜 되었고, 아이는 꼬물거렸다. 친정아빠는 암병동에 입원해 계셨고, 엄마는 아빠 병수발을 하시느라 나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으셨다. 조건은 별로 좋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결정된 일이었고, 이제 ‘어떻게’를 제외한 질문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임신 중 불은 몸을 나보다 더 걱정하시던 친정부모님께 결심을 알렸더니, 엄마가 정신없는 와중에도 내 운동시간 동안 아이를 보러 와주셨다. 아빠가 퇴원하신 이후에는 직접 베이비시터를 물색해 친정에 입주시키고 아이를 봐주셨다. 덕분에 나는 다이어트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렇게 40일쯤 지나자 임신 전 입던 옷을 입고 출근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 목표는 더 먼 곳에 있었다. 기왕 시작한 김에 끝장을 보고 싶었던 거다. 100일쯤 되어 25사이즈 청바지를 입던 순간에는 정말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이 기뻤다. 무엇보다 자신과의 약속을 철저히 지켜낸 스스로가 만족스러웠다. 낯선 사람, 특히 남자들의 호의적인 반응도 싫지 않았다.

그러나 기대했던 만큼 모든 문제가 일시에 사라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몸과는 상관없이 여전히 불편한 관계는 불편했다. 오히려 더 불편해진 관계도 있었다. 또 단순히 살을 덜어낸다고 모두 연예인처럼 예뻐지지는 않는다는 것도 깨달았다. 이 역시 오히려 전만 못해진 부위도 있었다. 내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의 원인이 살 때문이라는 가설을 재검토하지 않을 수 없었다.

100일을 기약하고 시작한 다이어트였지만 약속된 시간이 되어 원하는 것을 얻고 나서도 도저히 그만둘 수가 없었다. 다시 예전의 식습관과 생활습관으로 돌아간다면 몸 역시 그렇게 될 것이 뻔했다. 예쁜(?) 몸이 모든 문제를 저절로 해결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지만 일단 손에 넣은 것을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당시 나의 식단은 당당단, 즉 아침 당근, 점심 당근, 저녁 우유 한잔이었다. 그렇게 먹고 새벽마다 두시간씩 수동워킹머신위를 걸었다. 게다가 아무리 힘들어도 한번 일어나면 절대로 눈을 붙여선 안 된다. 피곤해야 살이 더 잘 빠진다나? 하는 그런 이유였다.

이렇게 몸을 모질게 볶아대면서도 목표를 향해가던 100일간은 힘든 줄 몰랐었다. 나날이 줄어드는 체중과 사이즈를 확인하는 기쁨에 세상이 아름다웠다. 그러나 일단 원하던 선물을 받고 나자 어김없이 찾아오는 하루가 고약한 일수쟁이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욕심만 앞서 무리하게 대출로 장만한 집에 살고 있는 모양새였다. 엄청난 대출이자 갚느라 정작 좋은 집을 즐길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하루를 마치고 잠자리에 드는 순간엔 늘 ‘다행이다. 오늘도 무사히 넘겼구나. 아~!! 이대로 내일이 오지 말았으면’하는 마음뿐이었다.

자연히 신경은 점점 날카로워졌고 가족들과도 동료들과도 점점 멀어져갔다. 뭔가 문제가 있다고 느끼긴 했지만 해결을 할 의지도, 시간도, 방법도 없었다. 하루하루 대출이자 갚고 나면 손가락하나 움직일 힘조차 남지 않았으니까.

맞다. 그 시절 다이어트는 내게 종교였다. 하지만 불행히도 나의 신은 맹목적인 희생만을 강요할 뿐 가장 중요한 마음의 평화를 주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 문제는 몸이 아니었다. 나는 공주이고 싶었다. 우아한 자태와 놀라운 재능을 보여주면 황홀해 하는 박수부대는 끊임없이 환호성을 질러대야 하는 거라고 믿었던 것이다. 조직에서의 불이익에 그토록 민감하게 반응했던 것도 나는 ‘특별하다’는 자만심에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언제나 사랑을 독차지하고 특별한 존재로 존중받고 인정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던 나는 바람막이 하나없이 사회에 나와 냉정한 현실에 부딪히자 당황했던 것이다. ‘이 사람들이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보여주기만 하면 다시 공주의 지위를 되찾을 수 있을 거야.’ 오해에서 비롯된 부당한 차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2년간의 자학적인 다이어트는 치열한 신분회복투쟁이었던 셈이다.

결론적으로 나의 신분회복 투쟁은 매우 유효했다. 하지만 전리품은 투쟁 전에 상상하던 것이 아니었다. 스스로에 대한 존경심을 회복하겠다던 최초의 목적을 부분적으로 달성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의 공주로 다시 태어나지는 못했다. 처음엔 이상하게 여겨졌던 것이 사실이다.

이렇게나 분명히 증명해냈음에도 불구하고 기대하던 환호는 없었다. 실망했다. 실망은 다시 분노로 이어졌다. 분노로 날이 서있는 나는 누가 봐도 한낱 신경질적인 몽상가였을 것이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나는 세상을, 세상은 나를 따돌리기 시작했다. 사람들로부터 멀어지면서 나는 책에 빠져들었다. 내가 세상과 불화하는 이유를 찾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2010.7 삶의 한 가운데서 쓰는 자서전, Me-story 중에서


이미지 출처 : https://pin.it/61Uhed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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