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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으로부터 온 초대장

살고 싶은 대로 한번 살아보고 싶었던 것이다!

by 아난다

알겠지? 내가 왜 굳이 중독의 용어를 구구절절 설명했는지를. 당시의 나의 독서는 그야말로 전형적인 중독의 패턴을 갖고 있었어. 여기에 더 절망적인 펌프질을 했던 활동이 바로 쓰기였지. 물론 처음엔 전혀 눈치채지 못했어.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책의 내용보다는 독서활동 자체에 목을 메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 거야.

당신이 늘 불평했듯 책 읽는 것 말고는 어떤 일에도 마음을 섞지 못하는 현상 자체도 문제였지만 그보다 나를 더 당황스럽게 했던 것은 닥치는 대로 섭취했던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뒤죽박죽 꼬이기 시작하면서 읽으면 읽을수록 뭔가 분명해지기는 커녕 점점 더 오락가락 혼미해져가고 있다는 사실이었어.

전형적인 ‘지적 소화불량 상태’였는데 문제는 대체 어디로 가야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지를 모르겠다는 거였어.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읽은 것들을 정리해보기로 마음먹었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글을 쓰는데 재미를 붙이게 되었던 거야.


글쓰기는 내게 여기저기에서 얻는 생각의 벽돌들을 이용해 나만의 생각을 짓는 작업의 다른 이름이었지. 항상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까?’를 신경쓰느라 노심초사하던 내가 글쓰기를 통해 드디어 ‘내 입장’이란 걸 갖게 되었던 거야.

그리고 생각했지. ‘아! 이런 충만한 느낌을 자부심이라고 하는구나!’ 글쓰기는 또한 마음의 묵은 각질을 벗겨내는 작업이기도 했어. 글로 조분조분 풀어내다보면 어수선한 마음이 시원스레 정리되곤 했는데 그때의 카타르시스는 나를 살아가게 하는 생명수와도 같았거든.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나의 글쓰기는 순전히 사적인 차원의 활동이었어. 내 글을 남에게 보인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지. 누가 강요해서 그랬던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남들 눈치보며 전전긍긍 살아온 지난 세월에 대한 반동 때문이었는지 내 글(생각)을 남에게 드러내 반응을 구하는 일은 절대로 하고 싶지 않았던 거야.


그러니 내가 점점 나만의 세계에 빠져들게 된 것은 어쩌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수순이었겠지? 읽기와 쓰기가 결합하자 ‘타임아웃’은 점점 길어졌지. 나중엔 뭐가 현실이고, 뭐가 환각인지도 구별하기 힘들어졌으니까.


내가 ‘중독’에 빠져있다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던 당시, 나는 ‘풍요로운 존재’가 되기 위해 쓸 시간과 에너지도 없는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과 소통을 하기 위해 자원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고 굳게 믿고 있었던 것 같아. 그렇다고 영 인간관계를 안 하고 살 수는 없었으니 어쩔 수 없는 경우에는 최대한 갈등을 피하려고만 했지. 그러기 위해선 무조건 상대에게 맞춰주는 게 제일 간단한 방법이구.

그렇게 관계의 이중장부를 쓰기 시작했던 건데...겉으로야 모두 친한 척했지만 진짜로 마음을 나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그건 다시 말해 더 이상 ‘사람’에게서 위안을 얻을 수 없게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했어.


설마 당신에게까지도 그랬던 거냐구? 미안해. 당신도 예외일 수 없었어. 아니 오히려 당신에게는 더 본심을 드러낼 수 없었지. 어떻게 해서 갖게 된 나만의 생각들인데...당신에게서 그걸 거부당하면 그땐 도저히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거든. 하지만 나라고 ‘소통’의 욕구가 전혀 없을 리가 있을까?


왜 나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생각하는 걸까?

내 이야기를 이해하는 사람은 정말로 세상에 하나도 없는 걸까?

그렇다면 내가 제대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지?

혹시 정말로 내가 ‘환각’에 빠져있는 거람 그땐 어떻게 해야하지?


말도 못하게 외로웠어. 이럴 줄 알았더라면 차라리 그냥 남들 틈에 섞여 그러려니 하고 살아갈 걸 그랬나? 지금이라도 그냥 모른 척 사람들에게로 돌아갈까? 그러나 내 생각을 포기하고 살아가기엔 나는 이미 너무나 분명한 ‘내’가 되어 있었어.


차라리 안 보았으면 모를까 이미 눈치채버린 새로운 세상을 못 본 척 하고, 견딜 수 없어서 도망쳐 온 현실로 다시 돌아가기가 쉬울 리 없잖아? 그렇게 이러지도 못하고 힘들어하고 있을 때 구본형의 <익숙한 것과의 결별>이라는 책을 만나게 되었지.


크리스마스 아침, 경복궁역에서 그를 기다리는 한 시간은 참 너무 길었다. 한 시간도 전에 약속장소에 도착한 건 그만큼 간절했기 때문이었다. 4개월 전 인터넷서핑하다 우연히 <익숙한 것과의 결별>을 알게 되었다. ‘살고 싶은 대로 한번 살아보고 싶었던 것이다.’ 서문 첫장에서부터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아~! 이런 삶이 정말 있구나. 그처럼 하면 나도 살고 싶은 대로 살 수 있다는 거지? 그거지?’ 한 줄도 놓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책을 덮을 즈음 우리집 책장엔 그의 이름이 찍힌 책이 열권도 넘게 꽂혀 있었다.

‘그처럼 살 수 있으면 후회 없겠다! 이제 더 헤매지 않아도 될지도 모른다. 일단 그의 곁으로 가자!’ 그의 책들과 함께 두 달을 보낼 무렵 내 마음에 날아든 메시지였다. ‘뭔가 이게 아닌 건 알겠는데..대충 어떻게 살고 싶은지는 나오는데..정말 그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내가 정말 해낼 수 있기는 한 걸까? 괜히 욕심내다 어렵게 만들어 놓은 일상의 편안함까지 잃는 건 아닐까?’ 지난 3년 악착같이 들러붙어 나를 지치게 하던 질문들에 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읽고 나자 그와의 만남을 기다리는 두 달은 그야말로 백 만년 보다 길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은 딱 50시간이었다. 그 시간 안에 내가 아는 그가 그저 ‘상품’인지, 진짜 ‘사람’인지를 판별해내야 했다. 12.25 오전 10시반 경복궁역에 도착한 내 각오는 경비가 삼엄한 적진을 염탐하러 들어가는 스파이만큼이나 비장했다. 정시에 그가 나타났고 그의 차를 타고 양수리를 향했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레몬즙을 만들고 각자의 이야기를 듣고 그러는 동안에도 내 감각은 온통 그를 향해 열려있었다. 그는 조용히 듣고 말하고 웃을 뿐이었다. 그 모습은 너무도 자연스러워 가끔은 그가 있는지조차 잊을 정도였다. 그러는 사이 여덟 명의 낯선 사람들이 상처를 드러내고 아픔을 안아주며 세상 누구보다 서로를 사랑하는 사람들로 다시 만들어지고 있었다. 신비로웠다. 나는 어느새 내가 거기 온 이유를 잊고 있었다. 아니 이미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그는 진짜다!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 하지만 그렇다고 당장 뭘 어떻게 해봐야겠다는 생각은 없었어. 나도 그 정도 상식은 있는 엄마거든. 태어난지 6개월이 채 안된 젖먹이 엄마가 회사까지 다니면서 뭔가 다른 도전을 한다는 게 얼마나 비현실적인지 정도는 판단할 정신은 있었거든. 게다가 내가 무언가에 빠지면 어떻게 되는지 누구보다 내 자신이 너무 잘 알고 있기도 했구.


그런데 막상 그의 홈페이지에서 함께 공부할 사람을 모집한다는 공지를 본 순간. 도저히 다른 일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 2010년 1월의 어느 일요일, 당신에게 아이들을 맡겨두고 승진시험 공부를 위해 집을 나섰지만 그날도 역시 한글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 어떻게든 공부를 해보려고 했지만 애를 쓰면 쓸수록 머리만 더 아파왔지. 그래서 독서실을 나와 카페로 갔어. 그리고 혹시나 싶은 마음에 응시원서를 쓰기 시작했지.


응시원서라고는 하지만 우리가 흔히 보는 지원서랑은 차원이 달랐어. 20페이지 분량의 개인사를 문장으로 써서 제출해야 했거든. 그런데 말야. 뭘 해도 집중이 안 된다던 나는 도대체 어디로 가버린 걸까? 점심 먹고 자리에 앉았던 기억이 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10시 카페 문닫을 시간이 되어있더라. 카페를 나오면서 생각했어.


가슴이 신호를 보내오는구나.

더는 못 참겠다고.

버틸 만큼 버텨 봤잖아.

그러니 적어도 원서는 완성해서 보내 보자.

지원한다고 꼭 되란 법도 없는 거니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가슴이 도저히 포기를 해줄 것 같지 않았던 거야.


이미지 출처 : https://www.deannalam.com/are-you-afraid-of-the-dark/woman-art-by-lucy-campb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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