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모르고는 살 수 있어도...
응시원서를 써내려 가면서도 ‘솔직히’ 붙고 싶은 마음보다 떨어지고 싶은 마음이 더 컸어. 내 몸이 내 맘대로 안 되는 상황이라 일단 원서를 써서 보내기는 했지만, 원서를 쓰는 더 깊은 의도는 얼른 추스르고 시험공부에 전념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라고 믿었어.
승진시험이란 게 아무리 싫다 못 견디겠다 해도, 그래도 적을 두고 있는 조직내에서 객관적인 기량을 입증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잖아. 물론 석차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합격/불합격을 가르는 시험이었지만, 시험 일정이 나오자 나도 모르게 ‘이번에야 말로 내가 누구인지 제대로 보여주리라!’는 오기가 끓어넘쳤지.
그러니까 ‘연구원 공지’를 보고 제멋대로 쿵쾅거리던 심장은 그야말로 어떻게든 진압해야할 반란군인 셈이었지. 하지만 반란군의 전력이 생각보다 강하다는 걸 알아차리자 얼른 새로운 전략을 생각해냈어. 일단 져주고, 시간을 벌어보자!
물론 그렇다고 원서를 대충 썼던 건 아니야. 혹여라도 최선을 다하지 않고 얼렁뚱땅 떼우려 했다는 게 반란군에게 들통나면 그 뒷일이 얼마나 복잡해질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니까. 삼십오년이란 세월을 매일같이 얼굴보고 싸우다 보면 그 정도는 싫어도 알게 되는 법이잖아.
치고 빠지자는 전략은 나름 괜찮아 보였어. 최대한 빨리, 하지만 온 정성을 다해 후다닥 원서를 제출해놓고 났더니 그제서야 승진시험을 위한 책이 눈에 들어왔으니까. 1차 발표가 있는 2월초까지는 아주 순조로운 수험생활이 이어졌지.
하지만 정말 갈등은 그때부터였어. 대체 무슨 조화인지 연구원 선발일정이랑 승진시험일정이 절묘하게 겹치는 거야. 다시 말해 한참 공부를 해야 할 시기인 2월 한달을 고스란히 연구원 레이스에 쏟아 붓고, 그렇게 2차를 통과하고 나면 시험보기 일주일전에 면접여행을 다녀와야 하는 그야말로 얄궂은 상황이 벌어진 거지.
내가 조금만 덜 아팠더라면 아마 이쯤에서 그만뒀겠지. 내가 아무리 현실감각이 떨어질 정도로 ‘나의 세계’에 빠져있었다지만, 그래도 '진짜' 현실이랑 ‘내가 만든 현실’ 정도는 구별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렇게 다 알면서도 여전히 몸이 말을 듣지 않았어.
‘이래선 안 되는데,,안 되는데’ 하면서도 어느새 레이스에 필요한 책 네 권을 몽땅 사서 안고는 헤헤거리고 있는 나를 발견했을 때의 당혹감이란. 한번쯤은 ‘가상현실’을 체험해 볼 계획을 하고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진짜' 현실에는 절대로 지장을 주지 않는다는 전제 아래서였는데. 이거야 참.
이제와 고백하는데, 본격적인 2차 레이스가 시작된 2월 초부터 3월 초까지 한달동안 당신이 시험공부하라고 만들어준 시간들, 고스란히 연구원 레이스하는데 썼다! ^^;;.
처음엔 시험과 레이스가 겹친 걸 ‘재앙’이라고 여겼지만, 막상 하면서 생각해보니 시험이 아니었더라면 그 어렵고도 두꺼운 책들을 그렇게나 꼼꼼하게 읽고 소화할 시간을 낼 수 있었을까 싶더라. 나보다 더 내 시험을 걱정하던 당신에겐 정말 미안한 일이지만 말야. 근데 ‘2차 레이스’라는 게 대체 뭐냐구?
그러니까 2차 레이스는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책을 읽고 리뷰를 하고 칼럼을 쓰는 건데, 읽고 쓰는 거라면 혼자서도 줄창 해왔으면서 새삼스레 뭘 그리 좋았냐구? 그러게. 나도 실은 그게 궁금했었는데...지금 와 생각해 보면 이 과정의 핵심은 바로 ‘사람'이었던 것 같아.
진지한 눈빛으로 내 생각에 관심을 기울여주는 ‘청중’. 가슴 깊은 곳에 숨겨 놓은 진짜 ‘나’와 공명해 주는 친구. 그리고 이런 모습을 그윽하게 바라봐주시는 믿을 수 있는 스승. 그들에게서 깊이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느낌.
레이스의 첫 주가 끝나갈 즈음 내 머릿속 전쟁도 이미 끝나 있었어. 결과는 당연히 ‘반란군’의 압승!!! ‘현실’이 어쩌구 저쩌구 하며 집요하게 잔소리를 해대던 정규군(?)도 막상 그 맛을 보고 나니 더 이상 ‘반란군’을 진압할 명분을 잃어버렸던 거지. 그렇게 4주를 책과 나에게 푹~빠져 지냈어.
하지만 이렇게 영혼의 주도권이 가슴에게 완전히 넘어갈 위기의 순간에 그동안 대장 노릇을 해온 ‘현실적 자아’가 마냥 손놓고 지켜만 보고 있었을까? 이제와 하는 이야기지만 걔가 왕잘난 척에 똥고집이긴 해도 완전 구제불능은 아니었던 모양이야. 이미 전세를 뒤엎을 수 없다는 것을 판단하고 나자 바로 주어진 상황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최대화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으니까.
지금이야 속편히 ‘운명’이라는 용어로도 이 일련의 상황들을 정리해낼 수 있지만, 당시의 나는 ‘운명’ 따위의 단어에 내 인생을 걸만큼 용감하지 못했거든. 바로 이때 결정적인 역할을 해준 것이 ‘이성’이라는 별명을 가진 ‘현실적 자아’였어.
이미지 출처 : https://www.terriwindling.com/.a/6a00e54fcf738588340240a4c6b4ce200d-p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