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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라는 이름의 옵션

그렇다면 내 길은 내가 만들어가는 수 밖에

by 아난다

그럼 이제 근 10년간을 철저하게 억눌려 살아온 ‘가슴’이 무서운 기세로 ‘더 이상은 못 참겠다!’며 제 목소리를 주장해오는 순간, ‘이성’이 ‘가슴’을 달래기 위해 내놓은 타협안을 살펴보기로 할까?


이대로 직장와 가정 사이를 충실히 오가며 10년을 더 산다고 칠 때의 기대 수익은? 사회적으로는 10년간의 경력? 물론 아무리 부정해도 명백히 존재하는 유리천장이 내 위에만 없을 리 없으니 10년 선배들 중 가장 잘 나가는 그분과 현재의 나 사이 적당한 어느 지점쯤이 되겠지?


‘최선’을 다하면 그 천장을 뚫지 못할 이유도 없지 않냐구? 그건 내가 가진 모든 에너지를 직장에 올인해보자는 의미인데, 혹 그렇게 해서 흡족한 위치까지 올라갈 수 있다고 해도 나를 필요로 하는 나머지 영역은 어떻게 되는 거지? 다시 말해, 우리 가정은 어떻게 되는 거냐구?


훈이가 6살, 영이가 2살. 선배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한동안, 그러니까 지금 말하고 있는 앞으로 10년은 아이들에게 엄마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기라는데 내가 일터에 목을 매고 있으면 우리 애들은 어떻게 하지? 과연 직장에서 인정받는 것이 사랑하는 아이들을 희생시키면서 추구해야할 만큼 중요한 가치일까?


물론 이것도 투입이 그만큼의 산출을 냈을 때의 얘기지만. 웬만큼 노력해선 집안은 집안대로 직장은 직장대로 이도 저도 아니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니 ‘가정’이라는 엄청난 가치를 건 투자치고는 너무 승률이 낮은 거 아냐? 아무래도 이건 길이 아니야.


그렇다면 또 하나의 옵션. 일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즉 직장에는 최소한의 에너지만 할당한 채 남는 에너지를 모두 가정에 투입한다면? 최소한의 에너지라고 하지만 근무시간까지 내 마음대로 줄일 수 있는 건 아니잖아. 아무리 욕심을 버린다고 해도 깨어있는 시간의 2/3를 보내는 직장에 그냥 몸만 왔다갔다 하는 건 조직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내 자신에게도 못할 짓을 하는 게 아닐까?


그건 다시 말해 단지 ‘돈’만을 위해 내 시간을 판다는 의미인데, 내가 그걸 감당할 수 있는 기질을 가졌다면 지금 이런 논의는 애초에 할 필요조차 없는 것 아니었을까? 게다가 앞서도 말했지만 아이에게 엄마와의 교감이 어느때보다 필요한 이 소중한 시기. 단지 ‘돈’만을 위해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팔겠다는 건 아이들에게 엄마의 존재가 ‘돈’으로 환치될 수 있다는 걸 인정한다는 의미인걸까? 이 경우 역시 가정과 직장 어느 쪽에도 충실하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다분하지 않을까?


그럼, 까짓 거 일을 그만둬버리는 건 어때? 미쳤구나! 정신 차려. 네가 지금 어디가서 이만한 돈을 벌 수 있을 것 같니? 너 엄마가 하시는 말은 다 어디로 들은 거야? 아무리 부부지간이지만 ‘경제력’이 없으면 아무래도 꿀리고 쫄리게 마련이라구. 너 설마 아빠가 특별히 나쁜 사람이라 엄마가 그렇게 힘들었다구 생각하니?


알겠어. 그러니까, 어떤 식으로든 경제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얘긴데...직장에서 답이 안 나온다면, 뭔가 이를 대체할 만한 소스를 개발해야한다는 거잖아! 뭐가 있을까? 네가 이 탄탄한 직장을 못 견뎌하는 이유가 뭐랬지?


첫째 재미가 없다. 잘 못하니까 그럴지도 모른다. 둘째 끝이 보인다. 것도 그다지 희망적이지 못한 끝이. 이걸 뒤집어 보면 답이 나오지 않을까? 그니까 무엇보다 네가 재미있게 잘 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봐. 그리고 그걸 재료로 상상하는 것만으로 전율이 이는 매력적인 그림을 만들어 보는 거야. 어때? 이제 좀 감이 잡혀?


어. 나 읽고 쓰는 거 진짜 좋아해. 잘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재미있어 하는 건 확실하거든. 만약 내가 이걸 잘 할 수 있다는 보장만 있다면 나는 작가가 되고 싶어. 아이들과 함께 여행도 다니고 공부도 하면서 이걸 글로 옮겨내는 게 내 일이 된다면, 솔직히 뭔가 ‘소모’당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육아에도 더 마음을 쏟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어느 정도 경제력까지 갖게 된다면 그야말로 일석삼조잖아. 와!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 정말로 그렇게 살 수 있었음 좋겠어. 와~!!


그래! 바로 그거야! 너는 자꾸만 ‘운명’이라고 우기고 싶어하지만, 지금 네가 흔들리는 건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 때문인 거라구. 물론 쉽지 않겠지만 분명히 에너지를 투자할 가치가 있다구. 그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적어도 네게 작가가 될 수 있는 역량이 있는지 어떤지는 검증이 될 거 아냐? 더불어 네가 정말로 작가로 살아낼 수 있는지도 시험해볼 수 있을 테구.


나도 그게 왜 하필 지금이어야 하는지를 이해할 수가 없었는데, 이렇게 조근조근 따져보니 이제야 알겠다. 야. 이건 그야말로 하루라도 빨리 시작하면 그만큼 이익인 프로젝트거든. 결과가 어찌되었든 말야. 네게 정말 작가로서의 자질이 있다는 걸 확인할 수만 있다면 까짓 거 승진시험이 무슨 대수겠니? 그리고 혹 그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고 해도 손해볼 것 없잖아.


그 사실을 네가 납득할 수 있다면 함께 힘을 모아 답답한 현실을 견디기가 오히려 더 수월해지지 않겠니? 소중한 현실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마음을 달랠 수 있는 다른 무언가를 찾아내면 될 테니까. 어때? 내 말 알아듣겠니? 어.


그럼 이제 다시는 ‘운명’이니 ‘우주의 신호’니 하는 무책임한 말 안하는 거다. 너는 지금 지극히 현실적인 선택을 하고 있다는 거 잊지 말라구. 네가 그렇게 난동을 부리지 않아도 내가 다 알아서 이렇게 하려던 참이었는데 너도 참 성질도 급하긴. 아무래도 세상을 살아가기엔 너보다는 내가 더 유리해. 그러니까 너는 함부로 전면에 나서지 말고 필요한 일이 있으면 꼭꼭 나한테 상의해서 일을 처리하도록 하는 거다. 알겠지?


어때? 꾀나 그럴싸하지 않아? 솔직히 난 지금도 잘 모르겠어. ‘가슴’이 먼저였는지 ‘머리’가 먼저였는지. 하지만 분명한 건 그때부터 누가 되었든 하나가 길을 내고 나머지가 열심히 그 길을 채워가는 식의 본격적인 협업시스템이 가동되기 시작했다는 거야.


이미지 출처 : https://www.facebook.com/pg/LupiArt/pos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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