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엄마는 이러면 안 돼?
물론 휴직이라는 결정이 쉽지는 않았어. 처음엔 당신에게 상의했던 그대로 일과 함께 병행해 갈 생각이었고. 나 자신은 물론이고 당신과 아이들, 그리고 바쁜 우리를 대신해 아이들을 돌봐주시던 양가 부모님 모두에게 가혹한 시간이 되리라는 걸 모르지 않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어.
이미 내 안에선 도저히 연구원을 포기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난 상황이었고, 더불어 ‘직장’ 역시 포기하기엔 너무나 아까운 떡이었으니까. 그렇게 레이스 첫 주가 가고 두 번째 주가 지나갔어. 35시간만 쓰면 된다고 믿었던 과제는 그야말로 밑빠진 독처럼 한도 끝도 없이 시간을 요구했고.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을 테지만 완벽주의적인 성향 덕(?)이라고 말하는 편이 훨씬 더 진실에 가까운 진단일거야. 대충 할거라면 굳이 시도할 필요도 없는 프로젝트였으니까.
내심 걱정이 되기 시작하더라. 과연 일과 함께 해 낼 수 있을까? 그러나 3주차 컬럼 주제로 주어졌던 '나에게 시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없었다면 결코 ‘휴직’이라는 선택지를 뽑아드는 일은 없었을지도 몰라. ‘내게 시간은 무엇인가’는 결국 삶의 우선순위에 대한 질문이었던 거야.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보냈던 일주일간 내가 한 일은, 내 삶의 중요한 구성요소인 ‘일’과 ‘가정’과 ‘꿈’의 역학관계를 냉정히 분석하는 거였어. 물론 그전에도 숱하게 해왔던 일이었지만, 움직일 수 없는 대전제를 건드릴 각오를 했던 건 이때가 처음이었지.
그 대전제가 뭐냐구? 나도 깜짝 놀랬는데...내가 도저히 저항할 엄두를 못 내던 절대명제는 어이없게도 ‘모험은 없다’였더라구. 그동안 나름 필사적이라고 믿어왔던 노력들이 ‘주어진 구조 안에서의 사소한 반항,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응석’이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지.
그러니까 나는 내 몸과 영혼, 그리고 가족들을 인질로 세상과 거래를 하려 했던 거야. 내가 가진 가장 소중한 것들을 아낌없이 걸었다는 점에선 더없이 비장한 용사였는지 모르겠지만, 아무리 너그럽게 봐주려고 해도 그건 무모하기 짝이 없는 자해공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지.
‘세상’이 날 특별히 미워해서라기 보단 ‘세상’의 입장에선 더 이상 내게 줄 것도, 또 더 주어야 할 이유도 없었으니까. 그러니 만일 내가 지금 이상을 원한다면 나는 그걸 가능하게 만들 수 있는 새로운 세상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수밖에 없는 거지.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이제 내게 남은 것은 결단이었어. 이대로 세상이 내게 허락한 것에 만족하면서 근근히 살아가던지 아니면 가진 것을 모두 걸고 내 세상을 만들어 보든지.
맑은 날 들판을 산책하듯 사는 사람은 행복하다. 어려운 일을 당하여 그 일의 밝은 면을 볼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과거 속에서 아름다운 순간을 늘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과일과 채소, 그리고 여러 곡물이 섞인 밥을 먹고 하루에 30분씩 운동하고 한 시간씩 햇빛을 쪼일 수 있다면 행복하다. 무엇인가를 할 때 다른 것을 계획하지 않고, 어떤 것을 계획할 때 다른 행위를 하지 않으면 순간에 몰입할 수 있다. 그리고 몰입된 순간순간을 살 수 있으며 행복하다.
다른 사람에게 비추어 자신을 알려고 하지 않으면 행복하다. 다른 사람이란 결국 왜곡된 거울에 불과하다. 늘 자신에게 비추어 자신을 발견하려는 사람은 행복하다. 일 년에 한 번쯤 흔들의자에 앉아 마치 다 산 것처럼 인생을 돌아보며 다음과 같이 질문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해질 수 있다. ‘나는 어떤 일을 이루고 싶었는가, 그리고 어떤 사람이 되고 싶었는가?’ 이 질문의 답이 찾아지면 인생은 목표를 가지게 될 것이고, 결국 그 길을 갈 것이니 행복해질 수 밖에 없다.
사소한 일이 주는 즐거움을 얻을 수 있으면 언제나 행복할 수 있다. 인생의 대부분은 아주 사소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으니까. 자신을 용서하고 동정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증오로부터 자기 자신을 자유롭게 만들기 때문이다. 많이 얻으면 그만큼 더 행복한 것이 아니라 베풀 수 있는 만큼 행복하다. 베풂은 씨앗 같은 것이라 주위에 뿌리면 수많은 결실과 함께 되돌아온다. 더 많은 씨앗을 얻게 된다.
바람이 조금 있는 아름다운 날에는 밝은 햇빛 속을 반바지 차림에 챙 넓은 모자를 쓰고 산책하고, 우울한 날에는 집안에서 그 기분에 어울리는 좋은 책 한 권을 볼 수 있다면 인생은 이미 행복하다. 이때 돈이란 밥 먹고 난 후 아이스크림 한 개, 또는 시원한 맥주 한 캔 마실 만큼만 있으면 되는 것 아닐까? 인생이란 그렇게 간단한 것 아닐까?
아, 내가 세상에 남기고 가는 것은 세월이 지나면 희미해질 내 삶의 발자국이고, 내가 가지고 가는 것은 꿈과 추억이다. 누구에게나 맞는 객관적인 삶의 의미란 없다. 나에게 주어진 구체적인 삶, 이 유일무이한 구체성이 바로 내 삶이고, 따라서 그 의미 역시 나에게만 주어진 특별한 것이다.
길은 없다. 이것이 길이다. 하루가 길이다. 하루가 늘 새로운 여정이다. 오늘 새롭게 주어진 하루가 또 하나의 멋진 세상이 되지 못한다면 어디에 행복이 있을 수 있겠는가? 변화란 불행한 자의 행복찾기가 아니겠는가.
구본형의 <마흔 세살에 다시 시작하다> 중에서
한 장 조금 넘는 지면에 정말로 행복해지는 법이 다 들어있어 놀랍다. 그리고 그렇게나 감동하고 좋아했으면서도 처음 읽은 지 3개월이 넘도록 실제로 행동에 옮긴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은 더욱 놀랍다.
책을 다시 읽으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저자의 이야기에 공감하고 그의 삶을 부러워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부러움이 깊을수록 현실은 더욱 고통스러워질 뿐이다. 어차피 변할 의지가 없다면 환상은 보지 않는 편이 나을 지도 모른다. 앞으로 계속 이대로 버틸 생각이라면 차라리 눈을 감아버리자. 그럴 수는 없다고?
그럼 필사적이어야 한다. 현실을 환상의 세계로 끌어 올리려면 가진 것 전부를 다 걸어야 할지도 모른다. 어려운 것은 당연하다. 쉽다면 幻想이라 부르겠는가? 하지만 그 속에 정말로 살고 있는 사람도 있다. 나도 그럴 수 있다. 내가 그러고 싶어 하기만 한다면. 진심으로.
돌이켜보면 ‘퇴직’도 아니고 ‘휴직’을 하면서 무슨 이리도 호들갑을 떨었나 살짝 쑥스러울 정도지만, 당시의 내겐 그야말로 대단한 결단이었거든. 당신이 내 휴직을 반대했을 때 내가 보였던 과민반응도 실은 당신만큼이나 나도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었을거야. 아슬아슬한 표차로 간신히 의결된 결정이었던 만큼 단호하게 지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던 거지.
이미지 출처 : http://www.lupiart.com/wo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