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것이든 가족과 타인에게 손상을 주고 있다면 중독으로 보아야 한다?
중독은 강박적으로 빠져들어 가는, 그리고 그로부터 벗어나면 견디기 힘든 불안감이 발생하는 그러한 패턴화된 습관으로 정의될 수 있다. 중독은 불안감을 누그러뜨림으로써 개인에게 편안함의 원천을 제공하지만, 이 경험은 언제나 다소 일시적이다.
중독은 일상적 삶의 부분들에 대한, 또한 자아에 대한 특정한 통제 양식을 나타낸다. 중독이 가진 특수성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 중독은, 전통이 이전의 어느 때보다도 철저하게 제거되어 자아의 성찰적 기획이 각별한 중요성을 갖게 된 사회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삶의 넒은 영역이 더 이상 기존의 패턴들과 습관들에 의해 결정되지 않은 곳에서, 개인은 계속해서 라이프 스타일 선택지(life-style options)들을 협상해야만 한다. 달리 말하면, 라이프 스타일 선택지들은 자아의 성찰적 서사의 구성요소인 것이다.
앤소니 기든스의 <현대사회의 성, 사랑, 에로티시즘> 중에서
‘책’ 이야기하다 말고 왜 갑자기 중독이냐구? 흠...내 입으로 이런 얘기하는 거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할 말은 하고 지나가야 할 것 같아서. 위의 문장은 앤소니 기든스라는 사회학자의 책에서 빌려온 건데, 좀 어렵긴 하지? 알면서 왜 굳이 인용하는 거냐구?
당신은 '중독'이 뭐라고 생각해? 우리가 알고 있는 대표적인 중독이 ‘알콜중독, 마약중독’ 뭐 이런 화학적 중독이잖아. 이런 중독들은 대부분 신체적 병리현상, 즉 질병으로 분류되고 있고. 근데 이 전형적인 질병을 지료하는 과정에서 연구자들이 알아낸 사실은 이런 중독들은 어떤 형식으로든 심리적인 의존과 결합되어 있다는 거래.
다시 말해 중독자들은 심리적인 결핍을 해소하기 위한 수단으로 ‘알콜’이나 ‘마약’같은 화학물질을 사용한다는 거야. 물론 처음에 치료자들은 화학물질이 교란시켜 놓은 신체적인 무질서를 회복하는 것이 치료의 핵심이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그들은 중독이 심리적 의존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어.
이런 각성을 중독치료에 활용한 대표적인 사례가 <익명의 알콜중독자들>이라는 프로그램이었어. 중독으로부터의 회복이 라이프 스타일의 심대한 변화와 자기정체성의 재검토를 의미한다는 깨달음 위에 기획된 이 프로그램은 회원들에게 심리치료와 상담 등의 전문적인 도움 외에도 비판이나 판단이 유보되는 분위기를 제공하는 것은 중요한 목적으로 생각한대.
이런 분위기 속에서 회원들은 자기의 가장 사적인 관심과 걱정들을, 당혹함이나 독설적 반응에 대한 두려움없이 열린 마음으로 터놓고 드러내도록 격려받는데, 바로 이 과정을 통해 회원들은 감추어 두었던, 혹은 자기도 모르던 상처를 치유받고 그 힘으로 자아의 서사를 새로이 써나갈 수 있게 된다는 거야. 이렇게 건강한 자기정체성을 갖게 되면 비로소 중독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능력, 즉 건강한 라이프 스타일을 선택하고 이를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는 거지.
나 지금 인정하고 있는 거야. 당시의 내가 전형적인 ‘중독자’였다는 것을. 내게 전통이란 세상에 내게 부여한 과업을 성취함으로써 세상에서의 내 가치를 확인받는 시스템이었을 거야. 내가 굳이 ‘전통’이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아무런 의심없이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흡족한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야.
그런데 어느 순간 세상이 날 배신했지.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이 원하는 것과 내가 원하는 것이 다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고 해야 할까? 어떤 과녁이라도 맞출 자신이 있다는 믿음으로 내내 ‘활 쏘는 연습’만 하고 있었는데, 진짜 세상인 사회에 들어와 보니 이놈의 과녁에 발이 달렸는지 이리 피하고 저리 도망가고 하여간 당췌 화살이 꽂히지를 않는 거야. 멋지게 명중시키고 그 순간에 쏟아지는 환호와 칭찬으로 살아가던 나로서는 정말 환장할 노릇이었지.
그러니까 목숨걸고 집착하던 다이어트는 이 난처한 결핍을 만회하기 위해 선택했던 최초의 ‘약물’이었던 거야. 도망치는 과녁만 탓하지 말고 내가 맞출 수 있는 과녁을 스스로 만들어 보기로 한 최초의 ‘시도’이기도 했구. (지금와 돌이켜보면 이 역시도 세상이 내게 강요하는 여러 가지 선택지중 하나를 고른 것일 뿐이었지만.)
결과는? 일부러 작은 사이즈만 만든다는 여성복 브랜드의 44사이즈 반바지를 넉넉하게 입어내던 순간의 희열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어. 165가 넘는 키에 44라니. 몸의 기능이 정상이 아니었던 게 오히려 정상인 상황이었지만 까짓 거 다른 것들은 아무래도 좋았으니까.
하지만 모든 중독이 의례 그렇듯 다음 수순은 부끄러움과 자책감으로 이어졌지. 과도한 운동과 영양 결핍으로 몸은 망가져가고, 희한한 식생활과 운동에 대한 집착으로 사회적 관계들은 더더욱 망가져가고.
다이어트를 시작한 애초의 목적이 ‘사랑과 인정’을 얻기 위해서였다는 걸 생각해 보면 그 당시 내가 얼마나 난처해하고 있었는지 상상이 되지 않아? 사랑받기 위해 죽을 힘을 다했는데 오히려 사랑에서 멀어지고 있었으니 말야. 특히 당신을 비롯한 가족들의 사랑으로부터...
당신도 알다시피 다이어트의 늪에서 빠져나오는 과정은 쉽지 않았어. 그동안 억눌려있던 식욕이 쓰나미처럼 밀려오며 생활을 엉망으로 만들었지. 다시 펑퍼짐해진 몸을 사람들에게 들킨다는 것도 참기 힘든 굴욕이었구.
그렇게 유난을 떨더니 결국 별 수 없구나!
수근대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꿈속까지 따라다녔으니까. 틈만 나면 유혹에 시달렸지.
그래도 다시 시작해볼까? 최상의 만족감은 아닐지라도 살기 위해 필요한 기본적인 안정감 정도는 다시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전형적인 ‘금단현상’이지? 지금도 당신에게 고맙게 생각하는데, 이 금단현상을 이겨내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사람이 바로 당신이거든. 규칙적으로 먹고 무리가 가지 않게 틈틈이 몸을 움직이는 습관을 만들어 주었으니까. 물론 이것도 다 지금와서의 평가지만. 당시엔 먹기 싫은 밥을 억지로 먹이고, 한번 하면 끝장을 보고 마는 내 운동을 필사적으로 저지하던 당신이 얼마나 원망스러웠던지...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당신이 재태크 강의를 듣는다는 명분으로 일요일 저녁마다 애를 맡겨두고 나가는 나를 한번도 막지 않았던 건 아마도 그렇게라도 ‘강박적인 다이어트 중독’에서 벗어 낫으면 하는 기대 때문이었겠지?
기왕에 미치는 거라면 가정경제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미치는 게 더 낫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구. 나 자신마저도 그렇게 생각했던 기억이 있으니까. 그러니 다이어트에서 재테크로 관심사가 옮겨갔던 것을 ‘중독’이라는 관점에서 간단하게 재정의하자면 ‘또 다른 중독으로의 이행’정도가 되지 않을까?
앞서 인용한 기든스의 설명에 의하면 하나의 중독에서 겨우 빠져 나온 사람이 결국 또 다른 중독에 굴복하여 새로운 강박적 행동 패턴에 고착되는 일이 흔히 있는데, 그런 사람은 음주와 과다 흡연이라는 식으로 두 가지 중독 행동을 결합할 수도 있고, 때로는 다른 중독의 열망을 지연시키기 위해 또 다른 하나를 일시적으로 이용하기도 한다네.
중독적 행동은 때로 부차적인 중독 또는 강박증이 핵심적인 중독을 뒤덮고 있는 식으로, 한 사람의 심리구조 속에 겹겹이 존재할 수도 있대. 그는 중독들이 이렇듯 기능적으로 상호교환 가능하다는 사실이야말로 중독이 특정 종류의 불안에 대처하지 못하는 기저적 무능력을 나타낸다는 증거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꽤나 설득력 있지 않아?
만약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내 중독의 핵심을 이루는 특정종류의 불안이란 도대체 뭘까? 어렵다구? 그래. 쉬운 문제는 아니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야말로 ‘박미옥’이란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핵심적적 키워드가 될 테니까.
위에서 말했듯 재테크 중독에서는 비교적 쉽게 벗어날 수 있었어. 하지만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또 다른 중독이었지. 새로운 중독의 이름은 ‘활자중독’, 다시 말해 ‘의미중독’. ‘내가 누구인지,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인지, 의미있는 삶을 위해 무엇을 해야하는지?’를 찾아 자는 것도 먹는 것도 잊고 ‘활자의 숲’을 헤매다녔지.
그게 뭐가 나쁘냐구? 에이~! 왜 그래, 당신이 말했잖아. 차라리 운동을 다시 하라구. 앞서 ‘중독’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했지만 이 모든 설명을 뛰어넘어 ‘중독여부’를 판별할 수 있는 명쾌한 기준이 있는데 그게 뭘까? 설마 모르겠다군 안 하겠지? 이 방면에 있어선 당신만한 전문가가 없다는 게 내 생각인데. 하하. 알았어. 그만 뜸들이고 말할게.
어떤 것이든 가족과 타인에게 손상을 주고 있다면 중독으로 보아야 한다.
앤소니 기든스
어때? 당신이 줄곧 말하던 것과 정확히 일치하지? 당신이 이 소리를 할 때마다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던 건 아마 그만큼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거야.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어떻게 해 볼 방법을 찾지 못했다는 것이겠지. 이 무기력감을 잊기 위해 또 책으로 도망쳐 들어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의 절망감이란.
이쯤에서 ‘중독’에 관한 특수용어 몇 가지를 더 소개해 볼까? 이후의 대화에 유용하게 활용될 듯하니까. 먼저, ‘하이(high)’는 마약 등에 의해 느끼는 무아지경이나 도취상태를 표현한 용어야. ‘어빙 고프먼’이란 사회학자는 '하이'란 '행위가 존재하는 곳을 찾아내고자 개인이 추구하는 바로 그것'이라고 정의하기도 한다네. 즉 평범하고 일상적인 세속적 특징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어떤 경험, 즉 해방의 순간에 즐기는 일시적인 고양감이지.
다음은, ‘픽스(fix)’. 이것은 마약 등을 스스로에게 주사하거나 흡입하는 행위, 또는 마리화나를 피우는 행위, 즉 중독물질을 체내로 넣는 모든 행위를 일컫는 말이야. 사람이 특정한 경험이나 행동 형태에 중독되면, ‘하이’를 달성하려는 시도는 ‘픽스’에 대한 필요로 바뀐대. 픽스는 불안을 완화시키고 개인을 중독의 마취 국면으로 들어가게 하지. ‘픽스’는 심리적으로 꼭 필요한 것이지만, 얼마 가지 않아 우울증과 공허감이 뒤따르게 되어 또 다른 ‘픽스’를 부르게 되지.
하이와 픽스는 모두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들로부터 해방, 즉 ‘타임아웃(time out)’의 형태들이래. 타임아웃 상태에서는 개인의 통상적인 노력들은 일시적으로 정지상태에 있게 되며, 머나먼 곳에 있는 듯 보이지.
말하자면 그 사람은 ‘딴 세상’에 있는 것이고, 그는 자신이 일상에서 하는 활동들을 냉소적 즐거움이나 심지어는 경멸감을 가지고 보게 될 수도 있는데, 이 느낌들은 종종 돌연히 역전되어 중독적 패턴에 대한 혐오로 변하기도 한다는 거야. 그러한 불만은 보통 중독이 통제될 수 없다는 절망의 형태를 취하는데 이는 개인의 ‘최선의 의도’에도 불구하고 일어나고야 마는 어떤 것이라는 설명.
이미지 출처 : http://www.lupiar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