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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난다 May 15. 2021

Back to the 기본기

그런 거였어? 아모르파티!

일터를 떠나 집에 있는데도 피로감이 도무지 가시지를 않았다. 정말 내 인생은 여기서 끝난 건가? 그렇게 또 한참을 앓았다. '루저', '실패자', '낙오자' 등등 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고 굳게 믿으며 맘껏 조롱하던 단어들이 잠시 쉴 짬도 주지 않고 나를 따라붙었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어찌어찌 아이들 학교 보내고 잠시 식탁에 앉아 숨을 고르고 있었다. 살짝 열어놓은 거실 창문틈으로 불어오는 바람에 하늘거리는 쉬폰커튼이 눈에 들어왔다. 노오란 햇살에 황금색으로 변한 커튼의 움직임이 어찌나 아름답던지. 피부에 닿는 부드러운 바람결은 또 어떻고. 살아있으니 참 좋구나! 그 순간 나는 '루저'도 '낙오자'도 아닌 온전한 생명체였다. 철들고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해방감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실업자, 만년왕초보주부, 실수투성이엄마...달라진 건 아무 것도 없는데 전혀 다른 세상을 만난 느낌이었다. '잘' 살고 있다고 자신했을 때도 느끼지 못했던 것을 모든 것을 다 잃은 지금 느낀다면 내가 그렇게나 집착하던 '잘'은 대체 무엇을 위한 '잘'이었을까? 그냥 살아있기만 하면 누릴 수 있는 소중한 것들을 '잘'하고 싶은 욕심에 눈이 멀어 다 놓치고 살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은 '잘' 살기 위해 만들었던 숨막히는 '로드맵'을 내려놓는 것인지도 몰라. 집착한다고 달라지는 게 없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그냥 다 내려놓고 '살아있음'을 즐겨보는 건 어떨까? 이제야 알겠다. 스승이 새로운 삶을 위해 결별해야한다고 말한 '익숙한 것'이란 외적인 환경이 아니라 '성과중독자, 효율중독자'로서의 마음의 습관이었던 거구나.


그때부터 새로운 탐험이 시작되었다. 내게 허락된 자유시간을 앞으로 도움이 될 것, 남들이 좋다고 하는 것, 멋진 것, 폼나는것이 아닌 나의 지금 이순간을 충만하게 하는 것으로 채워가기 시작한 것이다. 세상의 기준에서 멋진 몸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의 건강을 위한 식습관과 운동습관, 부자되기가 아니라 '최소한의 경제적 자유'를 지키기 위한 재무습관, '천직' 수련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 영혼을 풍요롭게 하기 위한 읽기와 쓰기. 프로주부를 뽐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본적 일상을 꾸려가기 위한 주변정돈 등등



돌이켜보면 나를 충만하게 하는 것들은 '잘'해보려고 미친 듯이 집착하다가 '잘' 안 되니 슬그머니 포기해버렸던 삶의 기본기에 다름이 아니었다. 물론 때때로 '잘'하는 것에 집중해도 시원찮을 판에 해도 티도 안나는 것들에 낭비할 시간이 어디있어? 하는 조바심이 바이러스처럼 침투해오기도 했다. 하지만 기본기가 쌓여갈수록 바이러스에 대한 면역력이 강화되는 것이 온 몸으로 느껴졌다.


그제서야 그리 열심이던 '필살기' 수련이 실패로 끝난 이유가 이해가 갔다. 새 삶을 위해서는 나를 둘러싼 관계의 물동이를 재정렬하는 것부터 시작해야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든 빨리 가정이라는 경계를 넘어서고 싶은 조바심에 나도 모르게 필요한 단계를 슬쩍 뛰어넘으려고만 들었던 거다. 독한 시행착오를 통해 세상 사람들을 다 속여도 나 자신은 속일 수 없다는 것을 뼈져리게 깨우치고야 정직하게 자신의 현위치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리 당연한 것을 스승은 왜 진작 가르쳐주지 않으셨던 걸까? 솔직히 원망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나중에 스승께서 하신 말씀과 책들을 다시 읽어보며 너무나 충분히 그 필요성을 전달하고 계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문제는 그 메시지를 알아들을 수 있을 만한 경험치가 부족했던 것뿐이었다. 그때는 안 보이던 것이 지금 보이는 것은 그동안 치뤄왔던 시행착오들, 인생이 다 끝난 것 같던 '절망'이야말로 내게 가장 절실한 메시지를 소화할 수 있는 센서를 열기위해 반드시 필요한 양분이라는 명백한 증거였다.


하고 싶은 대로 하면 그게 네 길일 것이니 그렇게 운명을 찾아갈 것이다.

구본형


천방지축 고삐풀린 망아지같던 제자에게 주신 스승의 수수께끼같은 말씀이 떠올랐다. 그렇게 다시한번 운명과의 깊은 화해를 할 수 있었다. 스승을 만나고 지금까지의 시간이 '주어진 삶'을 견디는 노예에서 '나의 삶'을 열어가는 주인으로 거듭나고 싶은 이라면 반드시 치뤄내야하는 전환의 과정임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실수이고 실패라고만 여겼던 그 모든 순간들이, 어떻게든 피하고만 싶었던 좌절과 실망, 우울과 무기력 마저도 가장 나다운 '사랑의 기술'이라는 요리를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재료였다니. 그 모든 과정을 통과해 여기에 살아있는 내 자신이 얼마나 사랑스럽고 자랑스럽던지. 뜻도 모르고 외우고 있던 한마디가 절로 튀어 나왔다.


아모르파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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