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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난다 Aug 21. 2021

『구본형의 마지막 수업』

모든 여행은 비밀의 목적지를 품고 있는 법이다.

마지막 원고를 넘겼다. 스승이 남기신 흔적을 꼭꼭 씹어 소화해 내어놓는 분에 넘치는 과제를 껴안고 부단히도 부대꼈던 시간, 설레임과 두려움, 뿌듯함과 억울함. 애뜻함과 원망. 사랑과 미움. 고마움과 미안함의 그 어디쯤인가를 하염없이 헤매던 여정도 이젠 끝. 솔직히 아직은 잘 모르겠다. 이 여행이 내게 어떤 의미였는지. 지금으로선 그저 피할 수 없었던 길을 끝까지 버텨준 스스로가 대견스러울 뿐.


선물을 주고 싶었다. 그런데 또 잘 모르겠다. 몸과 마음이 너무 지쳐있으니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수 있는 무위의 시간이 좋을 것 같다가도, 워낙에 가만히 있는 걸 힘들어 하는 아이니 오히려 신나게 몰입할 수 있는 새로운 아이템이 더 적당해 보이기도 하고, 그동안 과한 작업을 치루어 내느라 난장판이 되어버린 마음작업장 정리를 도와주면 제일 고마워하겠다 싶기도 하다. 그러다가 드는 생각.


그리도 존경하는 스승을 모시고 영혼의 구석구석을 알뜰히도 탐험하고 돌아온 이 사치스러운 여행 자체가 이미 넘치는 선물이 아닐까? 선물을 받아야 하는 사람은 이 여행의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조용히 자기 몫을 희생해 준 가족들이 아닐까? 그들은 어떤 선물을 제일 반가워할까? 한참을 이리저리 궁리하다 숨을 멈추고 눈을 감는다.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른다. 그리고 깨닫는다. 두려움, 억울함. 원망. 미움. 미안함, 슬픔 그리고 차마 말로 표현할 수조차 없을 만큼이나 유치하고 졸렬하던 그 모든 ‘나’들마저도 오롯이 넘치는 축복이었구나. 그동안 그렇게나 힘들었던 건 그들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그들로부터 어떻게 해서든 도망쳐보겠다는 헛된 욕심때문이었던 거구나. 빛으로부터 그림자를 분리해내 보겠다는 억지가 그토록 나를 지치게 했던 거구나. 삶은 이렇게나 부족한 나를 포기할 줄을 모르는구나. 세상은 나를 아낌없이 보살펴주었고 또 나를 필요로 하는구나.


조용히 눈을 뜨니 또 새로운 문이 보인다. 문틈 사이로 새어나오는 가느다란 빛줄기.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어쩌면 나는 진짜로 바보인지도 모른다.


방황한다고 해서 길을 잃는 것은 아니다.
모든 여행은 여행자도 모르는 비밀의 목적지를 품고 있는 법이다.

EBS 고전읽기* <동방견문록> 중에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마침내 책이 나왔다. 굳이 책씩이나 쓸 필요가 있는지를 의심했었다. 책상에서 글자랑 씨름할 시간과 에너지가 있다면 차라리 삶을 위해 쓰는 편이 훨씬 현명하다고도 생각했다. 어느 순간부턴가 집안 온 벽면을 가득 채운 책들이 점점 부끄럽게 느껴지기 시작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나를, 또 그럴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원망했던 그 마음도 분명 진심이었다.


그런데 막상 책을 받으니 이 느낌을 어찌 표현할 길이 없다. 스승과 나란히 적혀있는 내 이름을 보고 또 보고 또 봐도 또 보고 싶다. 이런 기분을 모르고 죽을 뻔 했다고 생각하니 아찔 할 정도다.


이제야 말할 수 있다.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라며 미리 체념해 버리지 않을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냐고. 걸리는 게 한 둘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떠나올 수 있는 용기를 내주어서 너무나 고맙다고. ‘역시 내가 미쳤던 거야’하며 자꾸만 도망치려는 나를 집요히 달래던 수고가 결코 헛되지 않았노라고.


생각할수록 신기하기만 하다. 나는 왜 글과 삶이 하나를 선택하면 나머지를 포기해야하는 양갈래 길이라고만 믿었던 걸까? 왜 선택한 그 길을 끝까지 가면 결국은 원하는 ‘그 곳’에 이를 수 있다는 스승의 일관되고도 명쾌한 가르침을 그리도 받아들이기 힘들어 했던 걸까? 이제야 알겠다. 삶은 곧 ‘체험’이라는 것을. 나의 감각으로 직접 느껴보지 않고는 결코 ‘살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 삶이라는 것을.


세상은 한 권의 책이다.
여행을 하지 않는 사람은 겨우 한 페이지를 읽을 뿐이다.
여행을 하는 동안 나는 내 몸이 우주의 일부임을 느꼈다.
땅 위를 걸으며 대지와 하나 됨을 느꼈다.
방랑이야말로 삶의 본질이며
영혼을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라는 사실도 느꼈다.
편견과 편협과 고집스러움이 여행을 통해 치유되었다.

『구본형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솔직히 아직은 알 듯 모를 듯 알쏭달쏭하기만 한 스승의 말씀. 그래도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언젠가는 나도 이 멋진 봉우리에서 삶을 조망할 수 있는 기쁨을 누릴 수 있으리라. 내 나이 마흔, 여전히 아침이 설레는 이유다.


* :『구본형의 마지막 수업』의 근간이 되어주었던 EBS 라디오 프로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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