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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난다 May 09. 2021

엄마의 세상이 열리는 순서

아이를 낳고야 발견한 꿈을 아이와 함께 길러 이룰 수 있다고?

매트릭스의 한 장면이 내 삶속에서 펼쳐지는 느낌이었다. 모든 수수께끼가 풀리던 순간, 화면을 비처럼 내리던 녹색 코드의 배열. 아무리 애써도 맞출 수 없던 삶이라는 퍼즐 조각들이 저절로 제 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스승과 함께 했던 1년이라는 시간의 의미가 더욱 선명하게 떠올랐다. 나는 그동안 뿔뿔히 흩어져있던 관계의 물동이들을 순서대로 배열하고, 가장 가까운 관계이자 가장 작은 세상인 ‘나 자신’이라는 물동이를 채워가고 있었던 거다. 그렇게 내 자신과의 관계가 어느정도 회복되자 가족들과의 관계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가족들과의 관계의 물동이가 충분히 채워지지 않고는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고 해도 결코 만족스러운 삶이 될 수 없다는 것 역시 분명했다. 다시 말해 나 자신, 그리고 가족들과의 관계가 튼튼하지 않고서는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더라도 행복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다양한 문헌과 선배 엄마들의 조언을 종합해 보니 작은 아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될 때까지 한동안 가정이라는 현장에 집중하는 것이 불가피해 보였다. 이제 막 돌이 지난 둘째 아이 기준으로 딱 10년이 남았다는 이야기였다. 물론 이 시기를 결정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아이의 성장속도에 달렸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예정대로 된다고 해도 꼬박 10년을 명실상부한 사적 영역인 ‘愛身愛家’ 단계에 머물게 되는 셈이었다. 일반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한참 일해야 할 시간대에 말이다. 모든 것을 한꺼번에 손에 넣고 싶었던 1년 전에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면 막막해 했겠지만 이상하게도 오히려 마음이 편안했다.


자신에 대해 공부하는 과정에서 이전 커리어를 새 일의 기반으로 활용할 수 있었던 대부분의 연구원 동기들과 달리 나는 완전히 제로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떤 일을 하게 되는지도 모른 채 그저 평생 안정적으로 다닐 수 있다는 이유로 선택한 일터였으니, 적성이나 기질, 가치 등 진로결정을 위해 한번쯤은 점검해봤을 사항에 대한 이해도 전무한 상태였다.


아니 오히려 세상의 기준에 나를 억지로 맞춰 사느라 내적인 감각을 억압하던 것이 만성이 되어 정말로 원하는 게 뭔지 자신조차 알지 못하는 지경이었다. 그렇게 엉망으로 훼손된 센서를 회복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했으니, 제로보다 훨씬 깊은 마이너스에서부터 출발한 셈이었다. 오래 방치된 가능성의 씨앗을 찾아내 세상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수준까지 키워내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한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었다.


한 분야의 전문성을 얻는데 필요한 시간이 1만시간이라고 한다면 휴일과 공휴일을 뺀 평일(연평균 250일)에 하루에 4시간씩 투자할 수 있다면 걸리는 시간이 딱 10년이었다.무슨 일을 하며 살더라도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육아라면 제대로 해보고 싶기도 했다.


빨간 날 다 쉬고 평일에 하루 4시간씩만 확보해도 미래가 보장된다면 훨씬 마음편히 아이에게 집중해줄 수있을 것 같았다. (아이가 어린이집에 갈 때까지 종일육아로 시간확보가 어렵다고 해도, 평균적으로 4시간 정도 시간을 확보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했다.)


계획대로 되어 준다면 10년 후에는 새로운 전문성으로 본격적인 일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는 시나리오였다. 그때쯤엔 아이들에게 필요한 엄마 역할도 절대 시간이 필요한 물리적 돌봄에서 자기 삶에 충실한 본보기가 되는 것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니 그야말로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아무런 기반도 없이 아이를 낳고 나서야 발견한 꿈을 아이와 함께 길러 자신의 세계를 열 수 있게 되다니. 소중한 사람들을 흠뻑 사랑하다보면 어느새 다음 세상의 문이 열린다니. 이 얼마나 완벽한 시나리오인가! 상상만해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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