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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van greene Feb 08. 2024

서평 - 보통의 존재

서평을 가장한, 자아 변천사와 현상태

간만에 우연찮게 <보통의 존재>라는 산문집을 보게 되었다. 나이 들수록 남 인생 이야기가 재밌다. 무엇보다 <보통의 존재>라는 제목이, '써야지.. 써야 되는데..' 하며 머릿속을 부유하던 글감과도 맞물려, 나라는 존재, 보통과 특별 이런 것들에 대해 끄적여 본다.



<스스로에 대한 인지의 단계>


나는 나의 존재를 언제 인지하기 시작했을까? 가족으로서의 누구, 친구로서의 누고말고, 독립된 개체로서의 '나' 말이다. 어렴풋하게나마, 고등학생이 되고 본격적으로 '자아'라는 것이 태동한 것 같다. 피상적인 것들에 대한 의문을 넘어, '왜?'라는 질문을 근원적인 것들에 던지기 시작하는 시점 말이다. 확실히 그것은 분기점이었으며, 판도라 상자였고,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이었다. 


그 뒤로 나의 자아의 변천.. 현재까지 크게 3단계로 나눠 봤다.




1단계 : 생각 A... 생각 B... 생각 AB... 생각 Z... 생각 a...



1-1. 스무 살 초반을 돌이켜보면, 어떻게 버텼나 할 정도로 생각이 많았다. 생각이 '많다'는 게 지극히 상대적이지만, 감각을 통해 (주로 시각) 인지하는 사물로부터 파생되는 생각이 시발점이 돼, 생각이 생각을 파생시키며 연쇄작용이 일어났다. 생각의 많음은 대개 어두운 색채를 띄고, 부정적인 생각들이 나를 침잠해 가면서 통제력을 잃을 때도 많았다. 때로는, 각자 발언권을 가지려 날뛰는 생각들을 그저 목도하곤 했다. 정확히는 방치가 맞는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유독 기억에 남는 주제는, 버스를 타거나 도서관에 가서, 줄곧 '인간은 사회적 동물인가?'라는 명제, 좀 더 정확히는 '꼭 사회적이어야만 하는가'에 대한 것으로, 몇 달간 치열하게 고민하던 시기가 있었다. 이밖에도 대학 전공에 대한 회의/인간관계로부터 파생되는 갈등/외모에 대한 고민/자본주의로부터 오는 번민/미래에 대한 불안 등.. 심연의 생각들은 뒤죽바죽이었다. 한 때는 산속에 들어가 7일 동안 묵언수행을 하고 나오기도 했으니, 생각과 고민에 얼마만큼의 비중을 뒀었던 시기인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1-2. 그때의 나는 스스로를 다양한 생각을 '할 수 있다'라고 착각했다. 여유로울 때는, 환경/인구/젠더/동서양/정치/경제 등 입맛대로 지적허영심을 탐닉했고 깊어지기 전에 빠져나오곤 했다. 또 다른 한편으로, 인간이라면 자연스럽게 겪게 되는 자기모순을 개별화해, '내가 문제인가?'라는 방식으로 귀결시키기도 했다. 실상은 그런 것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있었던 고민들이었는데 말이다.


고민은 돌멩이에 쪽지를 묶어 잔잔한 호수로 던지는 것처럼 마음 한편에 켜켜이 쌓였다. 돌멩이를 던지는 주체가 나 자신일 때도 있었지만, 타인이기도 했고 돌이 던져지면 수면 위의 파장이 얼마나 강할지 예측할 수는 없었다. 책 한 권 때문에 기존의 가치관이 다 무너지는 아노미상태에 빠지기도 하고, 책 한 권에 깊은 위로를 받기도 했다.



2단계 : 난 특별하지 않구나에 대한 발견 및 노선 변경


2-1. 20대 초반에는 1, 2년의 시간이 자아 형성에 굉장히 큰 차이를 만들었다. 한 해의 경험을 얻고 나니, 내가 갖고 있는 생각의 범위나 깊이 중 상당수는 그저 스쳐가는 상념에 불과했고, 특정 생각을 내가 주도적으로 발전시킨... 무언가 변증법적인 게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고민의 99%는 과거에 있어왔고, 상당수의 지식인들이 다양한 학파를 형성하며 논쟁을 해왔던 것이며, 이미 잘 정리되어 있었다. 자연스럽게 내가 했던 생각이, 나의 사고방식과 접근법이 특수성을 잃었고, 모든 게 의미 없어 보이는 상태에 봉착할 때도 있었다. 니체, 쇼펜하우어... 염세주의나, 허무주의에 쉽게 빠지는 자신을 보며 인문학보다는 차라리 현실적인 것들, 실리적인 것들에 집중하게 된다. 나는 어떤 자격증을 따고, 어느 회사에 들어가며...... 이런 것들 말이다.


2-2. 시간이 지날수록, 어느 정도 스스로가 '보통의 존재'라는 것이 객관적으로도 입증되며, 오히려 마음의 안정감이 형성된다. 뭔가 특출 나고 특별해야만 할 것 같다는 강박 같은 것들은 벗어던지고, '보통이면 어때?', '가장 평범한 것이 가장 특별한 것이다', '평범한 일상이 가장 행복한 것이다' 등의 글귀를 수집하여 보통의 존재를 시인함으로써 비롯되는 공백을 조금씩 채워준다.



3단계 : 난 특별하지 않지만.. 멋은 있다



3-1. 데미안


세상을 더 알아가다보며, 뭔가 제대로 된 게 생각보다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제대로 된 것처럼'꾸며낸 것들이 즐비하고, '척'을 하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았으며, 깊게 파고 들어보면 모든 것이 부실한 것 투성이라는 것을 직시하게 된다. 나이를 먹게 되면, 세상이 어느 정도 보이게 된다라는 말이 있던데. 그 사상의 초입을 지나치고 있다. 진실과 거짓, 맞고 틀림, 선과 악, 이런 이분법의 구분이 참으로 난제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정의란 무엇인가>, <공정하다는 착각>,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것' 혹은 그때 맞는 줄 알았는데, 그때도 틀렸던 것들이 왜 이렇게 많을까? 알을 깨고 나와 방황하던 새는 안정감을 찾았지만, 인생은 늘 그렇듯 새로운 곳에 도달한다.


3-2. 조지자


최근에 내가 업무적으로 존경하는 분께, '넌 역시 내 부족한 점을 채워주는구나'라는 말을 들었다. 좋았다. 잘생겼다는 말보다 짜릿했다...타성에 젖어 있었지만 순간 깨달았다. 아... 결국 내가 줄곧 좇아왔던 것은 '탁월함'이었구나. 


난 내 강점과 약점을 알고 있다. 또 내가 누군가와 있을 때는 무색무취가 되는지, 누군가와 함께할 때 빛이 나는지도. 요즘 행동과 실천을 테마로 이런저런 것들을 시도하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자잘한 실패들도 하고 있다. 쓰라리다. 근데 이 실패들도 하나의 집대성된 결과물로, 언젠가는 썰로 풀릴 것을 알기에 무소의 뿔처럼 나아간다. 돌이켜보니, 삶의 궤적들이 온통 그런 것들 투성이었다. 기세를 몰아서 조져야 하는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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