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자본주의는 24/7 모든 것을 소비한다. 대상이 무엇이든 하등 중요치 않다. 그러다 보니, 소비를 위한 생산을 넘어, 생산을 위한 소비마저 이뤄지며, 뫼비우스의 띄처럼 무한 반복된다. 자본주의의 속성이 그러하니, 자본주의 속 사람들은, 소비하지 않고는 도저히 못 배긴다. 사야 될 거 같고, 알아야 될 거 같고, 가야 될 거 같고, 먹어야 될 거 같고, 입어야 될 거 같고.
2. 자본주의 이 화마 같은 녀석은, 돈을 지불하고 얻게 되는 재화에 대한 소비에서 그치지 않고, 사람들의 시간마저 연소시키고 있다. 요즘 블랙홀처럼 개인의 시간을 앗아가는 녀석은 '숏폼 콘텐츠'다. 콘텐츠 영상을 소비하는 것은, 재화를 소비자 할 때와 비견되지 않는 감정의 다채로움을 선사한다. 특히, 사람과 관련한 영상은 더욱 그렇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아프리카 부족의 일상을 찍은 다큐멘터리 영상까지 가지 않더라도, 각자의 일생에서는 마주치지도 못했을 누군가의 삶을 엿볼 수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이 얼마나...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인가.
3. 근데 난, 누군가의 일상을 담은 영상이 단편적으로 잘라져 연출될 때, 그것에 반응하는 모습들이 기괴할 때가 있다. 특정 시점의 언행이, 결국 맥락 없이, 뉘앙스 없이, 그것을 재인용하는 전시자의 의도에 따라 철저히 각색되기 때문이다. 적절한 배경음악, 내레이션의 뉘앙스까지, 가미되면 끝이다. 특히, 최소한의 맥락 없이, 피상적인 단면을 보며, 솔로몬에 빙의되어 아무나 단두대에 올릴 때 더욱 그렇다. 관상을 보니 이렇다, 눈빛을 보니, 과거 언행을 보니... 어쩌고 저쩌고. 그래서인지 어느샌가부터, 이해관계의 반대편에 선 입장의 사람의 비판, 심지어 비난보다도, 아무런 의식 없이 배설되는 제3자의 댓글과, 그것이 구심점이 되어 형성된 군중심리에 동조하는 무리에 지독한 거부감이 생겼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 속 집단 광기가 일으킨 참상들이 실제로 발생 가능한 일이었겠구나 이해도 가더라. 지금 보이는 현상의 속성과 다를 바 없으니 말이다.
4. 초등학교 때인가, 인터넷 실명제에 대한 토론의 결론은 늘, '표현의 자유'라는 무적논리를 호가호위한, 익명성의 승리로 마무리되곤 했다. 맞다..'표현의 자유'는 분명 이전 세대가 쟁취한 인류의 유산이고 후세인 우리는 이를 잘 보존하고 계승해야 된다. 하지만 정보통신 기술이 극대화된 요즘은, '표현의 자유'에 대해 시의성 있는 고민이 필요하다. 이따금, 특정 개인의, 다수로부터 환영받지 못할 행태보다, '표현의 자유'라는 탈을 쓴 채 내뱉어지는 것들이, 얼마나 무감각하게 자행되는 일상적인 폭력인가 싶다. 그렇다 보니, 누군가를 평하는 의견에 대해, 쉽게 동조하고 편승하는 것을 경계하는 것을 넘어, 온라인 공간에서는 특정 누군가에 대한 발언 자체를 하고 싶지 않다.
5. 적지 않은 사람들이 시간을 들여 감정을 '소비'하는 행위 자체에 취해있는 것 같기도 하다. 마치, 울고 싶어서 우는 날이 있을 때 괜히 슬픈 영화를 찾아 시청하는 것처럼, 그제는 누군가의 우월함과 행복을 찬미하고, 어제는 연민과 슬픔으로 공감하고, 오늘은 또 다른 이의 추락에 조소를 띄며, 그러다 내일은 정의의 사도가 되어 생면부지의 사람을 위해 목소리를 드높일지도 모른다. 결국 자본주의가, 재화를 넘어 시간마저 소비함으로써 생기는 폐단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6. 마음 한편에는 늘 '나의 초라한 반자본주의'라는 책을 품으며 산다. 몇 년 전 제목만 보고 묘하게 빨려 들어 구매를 했고 소장하고 있는데, 늘 이 책을 접할 때면 묘한 감정이 든다. 뭐랄까.. 평생 적도 부근에 살다가, 타국으로 여행 와서 눈 내리는 겨울을 볼 때의 감정이랄까?
자본주의라는 규범 바깥의 관점, 자본주의가 모든 것을 집어삼키기 전에 우리 삶에 소중했던 것들..
사시사철 여름만 있는 줄 알았던 내 삶에, 전혀 다른 세상의 실존을 목도하는 느낌
이번 주말에는 간만에 이 책을 다시 읽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