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편 : 퇴사 후, 누워서 보낸 한 달

by Evan greene




1.


별다른 계획 없이 회사를 떠난 후의 일상은 마치 진공 속 같았다.




비어 있는 듯하면서도 가득 차 있는 듯한 느낌,

뭐라도 할 수 있지만 아무것도 아닌 상태,

공허한데 충만한 기분.

불안한데 편안한, 그런 감정들의 중첩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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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순간 시간 부자가 된 나는,

돈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는 졸부처럼 사치를 좀 부리다 지쳐 나가떨어졌다.


초반에는 책도 보고 영화도 보고 여행도 가고 운동도 많이 하고

잠도 충분히 잤음에도 시간이 남아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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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 한동안은 하릴없이 누워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문득 당분간은 이렇게 누워서 천장만 바라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할 것도 없겠다. 간만에, 여유나 부려보자!




2.

나는 종종 상념에 잠기는 것을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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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일화지만, 어느 예고 미술부에 가서 5시간 동안 두상모델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3시간이 경과할 무렵, 담당 선생님 曰


'되게 안 움직이시네요'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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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탄을 하셨던 적이 있다.





사람의 집중력이란 게 참 신기하다.

어쩔 때는 1분도 견디기 힘든데,

무언가에 몰입하면 몇 시간도 금방이다.



나는 그때 그곳에 없었다.

육신은 머물렀지만

정신은 어디론가 홀연히 유영하고 있었다.





생각을 할 때도,

그 생각 자체에 몰입하면,

그건 사색이라는 행위로 거듭난다.




3.



그렇게 나는 퇴사 후 본격적으로 천장을 바라보며 사색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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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보다는 바닥에 눕기를 선호했는데, 바닥이 조금 더 삶을 해태하는 듯한 느낌을 준달까? ㅋㅋ그래서 바닥에 주로 누웠다.





어쩌면 시간에 쫓겨온 지난날들에 대한 치기 어린 복수였을지도,

바닥에 눕는 게 진짜 여유로워 보이잖아





그렇게 위층을 투시할 수 있을 것처럼 천장을 보고 있다 보다 보면,

마치 내가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에 나온 벌레로 변해버린 남자의 삶을 오마주 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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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그러니 방 안에 존재해 보는 것,

신경계를 흥분시키고 감각을 자극하는 외부로부터 단절된 채,

오감을 극대화시키는 것, 이때의 명징함을 토대로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4.



그런데 계속 그렇게 있다 보면, 알레르기 반응처럼 '슬슬 뭐라도 해야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다 이내 자아가 진짜 12등분 난 것처럼 저마다 소리친다.



'이 ㅁㅊ놈아 시간을 이렇게 쓰면 어떡해. 뭐라도 해 뒤처질래?' '지금 다 뛰는데 쓸모없는 인간이 될래?', '인플레이션 미쳤는데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지 누워서 뭐 하냐'





그럼에도 나는, 눈과 귀를 막지 않고 고어물을 쳐다보는 것처럼, 내 감정들을 1인칭 관찰자시점으로 지켜봤다. 그 불안함에 쉽게 투항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다잉메시지를 전하듯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더 격렬하게 쉬라던' 동료들의 당부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쉽게 포기해서는 안 된다. 계속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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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민주 시민이 광장에 나가 시위를 하듯 공공연하지는 않았지만,

바닥에 누워 천장 바라보기는 그와 비슷한 일종의 투쟁이었다.






항상 발전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전속력을 질주하고 있는,

스프링벅의 대열로부터 이탈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역주행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언젠가부터, 불안을 달래려 '뭐'라도 하려는 나와

사람들의 모습이 참으로 애처로워 보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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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소리가 울리면 침을 질질 흘리는 파블로프의 개와,

불안에 반응하여 '뭐'라도 하려는 인간의 모습이 본질적으로 무엇이 다른가.




다들 뒤처지기 싫어서, 무시당하기 싫어서, 인정받고 싶어서, 잘 살고 싶어서, 사랑받고 싶어서 그런 거겠지...






근데 나는 그 굴레를 끊고 싶었고, 퇴사 후 바로 끊어냈다.


그게 통하는 시대도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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