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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van greene Nov 03. 2023

202호에 사는 개인주의자


1. 인상 좋은 개인주의자


인상이 선하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그래서 젊은이들보다 나이 좀 있는 어른들이 좋아해 주신다. 감사하게도, 집 보러 간 부동산, 목에 담 걸려 간 한의원, 같이 일하는 고객사 등에서 알게 된 어른들이 당황스러울 정도로 소개를 시켜주려 하신다. 인상이 선하고 사람이 좋아 보여서 해주고 싶다고.


근데 말이다. 다들 뭔가 오해가 있으신 거 같은데, 나 그렇게 마냥 착한 사람 아니다;;;


태어나보니 하드웨어가 ‘선한 것’ 뿐이며, 탑재된 소프트웨어는 ’냉정한‘ 개인주의에 가깝다. 종종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즐기기도 하지만, 집단활동 자체를 선호하지 않는다. 그래서 몇몇의 주변인들과 깊은 관계를 추구하고 있으며, 혼자 방구석에서 사유하고 시간 보내는 것을 소중히 여긴다.


그다지 온기가 넘치는 사람도 아니다.


그냥.. 인상 좋은 개인주의자 정도 아닐까 싶네


2. 개인주의를 표방한 이기주의자들


개인주의가 그다지 자랑할 만한 것은 아니지만, 난 개인주의가 좋다.


그래서 집단주의자들과 같이 있기 힘들다. 근데 난 집단주의자보다, 개인주의를 표방한 이기주의자들이 더 견디기 힘들다. 얄팍한 술수와 셈법으로 득실을 계산하고, 하나도 손실을 보지 않고 자기의 이득은 공고히 하는 행태. 겉으로는 개인주의를 내세우면서도, 교묘하게 ‘이기심’을 숨기려는 모습. 내가 가장 꺼려하는 유형의 인간 군상으로, 되도록이면 그들의 반경에서 멀어지려 한다.


내가 지향하는 개인주의의 바람직한 모습은, 성숙한 개인주의자의 모습은, 이기주의와 ’결‘ 자체가 다르다.


a. 개인주의자는 울타리 안의 사적영역을 침해받지 않고, 침해하지 않지만, 언제든 ‘서로 오고 갈 수 있는 높이’의 울타리를 쳐 놓고 산다.


(성벽이 아닌 울타리를)


b. 그리고 울타리와 울타리 사이에(회색지대) 문제가 발생했을 때, 계산하지 않고 울타리를 넘어가 그 문제를 해결한다.(이기주의자는 울타리 안에서 절대 안 나옴)


개인주의자인 나는 인상은 좋아 보일지라도, 평소에 사람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고 호의적인 사람은 아니다. 오히려 매사에 진지하고 심각하며 고지식한 사람에 가깝다.


하지만 그건 평소고, 만약 당신이 억울한 누명을 쓰거나, 불합리한 처분을 받는다면, 나는 우리의 친밀도를 ‘계산’ 하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당신을 도울 것이다. 그리고 내가, 곤경에 처했을 때, 내가 당신을 위한 것처럼, 당신도 나를 도와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각자의 일신(一身), 가족(家族) 먼저 챙기고, 여력이 있으면 서로 돕자. 이게 개인주의자들 간의 ‘암묵적인 합의’라고 생각한다.


3. 멜론 어케 깎냐?


최근에 오피스텔 건물의 소방시설에 문제가 생겼는데, 잘 해결됐다. 요약하면, 안전, 과태료 부과 등 문제는 점점 심각해져 가는데, 아무도 나서지 않거나, 나서기 힘들어해서 그냥 내가 주도해서 해결했다.


오픈채팅방부터 팠다. 입주민 분들 다 들어오라고. 내가 내용 파악하고 정리해서 알려주고, 해결까지 할 테니, 협조만 부탁드린다고.


이해관계자들 많았다.


a. 소방서 b. 건물 관리업체 c. 시설수리업체 d. 구청에서 파견한 건물 소방관리담당자 e. 집소유자 f. 입주민들 g. 상가


문제 발생 경위, 진상 파악, 해결방안 등등 과정 중에 관련 소방법도 찾아보며, 공무원 및 사설 업체 담당자들과 조율하며 결국 마무리했다. 더불어, 가격이 합리적인 수리업체로부터 견적도 다시 받아서, 다음 달 관리비에 각 세대에 돈도 몇만 원 환급하게 만들었다


나도 결코 한가한 사람이 아니다. 내 거 할 거 다 하고도, 여력이 있어서 나선 것이다.


사람들이 묻는다.


‘뭐 하시는 분이냐고, 고생 참 많으시네요 너무 감사하다고’


난 202호에 살고 있는 인상 좋은 개인주의자다. 그대들과 일면식도 없고 앞으로도 볼 일 없을 것이다.


이번에는, 내 울타리와 당신의 울타리 사이, 회색지대에서 문제가 생겼었고 여력이 돼서, 먼저 솔선수범한 것뿐이다.

그러니 언제가 돼도 좋으니, 내가 아닌 누군가에게라도 당신이 여력이 있을 때 똑같이 나서달라고. 그거 나대는 거 아니고 용기 있는 거고,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 연대‘라고.

어제 집에 오니까 문 앞에 선물도 있더라

누가 멜론도 줬네.. 근데 이거 어케 깎는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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