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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나의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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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van greene Nov 11. 2023

독기(毒氣), 복기(復棋), 호기(豪氣)

1. 독기(毒氣)



초등학생 때 잘못을 저지르면, 책 한 권 전체를 베껴 쓰곤 했다.


(아버지의 훈육방식 중 하나)



시간이 오래 걸리다 보니, 주말에 하루 날 잡고 도서관 3층의 열람실로 갔다. 잘못이 엄중할 때는, 같은 책을 2,3번 옮겨 적게도 하셨다. 그럼, 아침에 도착해서 책을 베껴 쓰기 시작해도 저녁 무렵 끝이 났다. 중간중간 팔에 쥐가 나기도 하고, 이따금 손이 부서질 듯 아팠다.



이래저래 잔머리를 굴리다, 볼펜 두 개를 동시에 쥐어 써보기도 하고, 친구를 매수해서 부탁을 해볼까도 궁리해 본다. 결국 요긴한 방도를 찾지 못하다, 부아가 치밀어 밖에 나가 괴성을 지르기도 했다. 그러다 제풀에 지쳐, 다시 쓰기 시작한다.



반성 => 분노 => 참회 => 원망 => 반성….



만감이 교차하다 결국에는 늘 ‘독기’로 다 달랐다.



‘내가 포기할 것 같아?’ 한 자도 빠뜨리지 않고 모두 옮겨 적는다. 집에 돌아와 당당히 아버지께 노트를 보여주는 나의 모습이, 그때의 장면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2. 복기(復棋)



아무짝에도 쓸데없다고 생각한 수 십 권의 노트들을 보며, 차라리 책을 읽게 해달라고 말씀드렸다.(잘못은 초딩 지가 해놓고ㅋ) 왜 매번 쓸데없이 시간 허비하게 하냐고? 내가 주워온 자식이냐고 대들었다.



아버지는 완강하셨다. ‘어떻게든 해라’



그 시절을 복기해 보면, 그 훈육방식이 끔찍이도 싫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때의 독기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쉽게 포기하지 않고 소소한 성취들을 이룰 수 있었던 토대였던 것 같기도 하다. 더불어, 내 현재 정체성에도, 작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도 하고.



가장 최근 이룬 정량적 성취는, 3년의 인바디 변화 추이다. 그간 숱한 대내외적 요인들로(코로나, 부상, 공부, 야근, 술자리 등) 중간중강 일시 중단하고 때로는 몇 달씩 쉬기도 했지만, 어쨌든 목표 한 바를 이루었다. 점 세 개 박힌 투박한 저 꺾은선 그래프가, 그 어떤 화려한 그래프보다 내게는 많은 의미를 내포한다.


3. 호기(豪氣)



지금까지 나의 독기는 공부나 운동 같은 자기 계발을 위해 사용되곤 했지만, 앞으로는 다르다. 요약하면, 인바디 그래프의 Y축을 골격근량에서 ‘돈’으로 바꾼다. 미래형 아니다. 현재형이다. 기울기가 더 가파를지, 완만할지는 나도 지켜봐야 된다.



이제는 무턱대고 필사하는 일 따위는 없다. 어쭙잖게 공부를 위한 공부를 한다거나, 타자의 시선(사회의 일반적 기대)에 주안을 두고 선택하는 일도 없다. 요즘 이런저런 시도를 해보면서, 나의 가설들을 입증해 나가고 있다. 마음속에 해소되지 않은 감정도 점차 사라지고 있으며, 군더더기도 떨쳐내고 있다.



필연적으로, 회의감이 들 것이며, 방향을 잃을 것이며, 생각이 전복될 것이다. 그럴 때면, 그래프가 페이스메이커(과거의 나)가 되어줄 것이다. 독기를 갖고 호기롭게, 패기 있게 밀고 나간다. (자기 확언) 그냥 객기 부리다 끝날 거면 시작도 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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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아직 시작 안 했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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