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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전 수필] 정이 흐르는 사회

사람 사는 세상을 위하여



 며칠 전 인터넷에서 매우 흥미로운 내용을 보았다. 어느 원시부족의 이야기인데, 이 부족에서는 누군가 죄를 짓게 되면 매우 특별한 방법으로 그를 처벌한다고 한다. 먼저 죄를 지은 이를 광장에 세우고, 부족 사람들은 그를 둥글게 에워싼다. 그리고 돌을 던지는 게 아니라, 죄를 지은이가 지금까지 했던 좋은 일들에 대해 이야기해준다.     


 “그래 그때 너 때문에 비가 오는 우리 집 천장을 고칠 수 있었어. 고마워.”     


 “무거워서 옮기지 못했던 짐을 너 때문에 옮길 수 있었어. 고마워.”     


 “우리 집에 와서 즐거운 표정으로 밥을 먹어줘서 고마워.”     


 마을 사람들이 모두 돌아가며 몇 날 며칠간 그를 칭찬해 준다고 한다. 그러면 그 죄인은 예외 없이 눈물을 흘리며 죄를 뉘우친다고 한다.      


 지금 우리 사회의 처벌방식과 비교했을 때 매우 평화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방법임이 틀림없다. 물론 사회의 크기나 제반 여건에 따라 이러한 방법이 효율적일 수도 비 효율적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가장 원시적인 것이 가장 자연적이며 인간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문명사회가 발달하면서 만들어진 ‘사회’를 지탱하기 위해 비정상적인 논리가 세상을 지배한 것인지도 모르니까. 글에는 여러 가지 예상 가능한 댓글들이 달렸다.     


 “저건 경범죄에서나 써먹을 수 있는 일이지, 흉악범한테 어떻게 써먹겠어?”     


 “저렇게 해도 태생이 고약하면 못 바꾸지, 사람이 그리 쉽게 바뀌나.” 등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볼 점이 있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문제일 수 있지만 과연 흉악범은 사회가 만든 것인가. 흉악범이 득세하다 보니 사회가 이렇게 삭막해진 것인가. 과연 우리는 여기서 어떤 해답을 내놓을 수 있을까.     


 저 원시부족에서는 애초에 중범죄가 일어날 가능성이 희박할 것이라 예상된다.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저런 것들을 보아오며 자랄 것이기 때문이다. 과연 이런 환경에서 자라난 아이들이 흉악한 범죄를 저지를 수 있을까.


 결국 이것은 처벌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교육에 관한 문제이다. 법의 강제성은 가장 최소한으로 적용되어야 하며, 최후의 수단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최후의 수단이 최선의 수단으로 전락하는 나라에 자비란 없다. 폭력을 제어하기 위한 폭력이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것처럼. 그래서 우리에게는 선(善)이라는 개념이 필요하다. 그것은 규정짓기에 따라 도덕이나 정의 등의 말로 치환될 수 있지만, 가장 비슷한 의미를 가진 말은 ‘인간적인’이라는 말이 아닐까 한다. 이러한 선(善)은 우리가 살아오는 세상에 따라 정립된다. 즉 우리가 소속되어 있는 세상의 교육에 따라 자연스레 배워갈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중요성에 따라 요즘 많이 회자되는 단어가 있다. 바로 마을 공동체이다.



photobyshinsangcheon.2016


마을 공동체     


 어느 순간부터 미디어를 통해 쏟아지고 있는 키워드이다. 요즘은 1인 가구나 핵가족들이 많다 보니, 이웃들과의 소통도 없고 개인생활에 모든 것들이 치중되어 있다. 이러한 시스템의 폐해를 타파해보고자 마을 사람들이 모여 육아도 하고 교육도 시키고 공동체를 만들어 살자 라는 개념이다. ‘마을’과 ‘공동체’. 우리는 이 두 개의 단어의 의미가 많이 희석된 세상에서 살고 있다. 7~80년대만 해도 마을이라는 말을 많이 썼다. 하지만 90년대가 되고 도시형 성장세가 계속되다 보니 2000년대 이후부터는 어느새 마을, 동네라는 말이 사라져 버렸다. 이는 단지 지리적 범위가 넓어져서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이 단어들은 지리적 범위 이외 사람 사는 정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런 단어들이 사라져 버렸다는 건 성장 일색의 세상 속에서 그만큼 사회가 각박해졌다는 말일 것이다.     


 옛날엔 앞집, 뒷집, 옆집이 서로 못 살아도 음식 같은걸 나눠 먹곤 했다. 옆집에서 하루 종일 놀아도 집에서는 의례 그러려니 하고 걱정하지 않던 세상이었다.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그만큼이나 실질적이고 소중했던 시대. 그러던 어느 날 그런 교류가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음식을 나눠 먹기는커녕 옆집이라고 음식을 가지고 오면 의심부터 하기 시작한다. 아니 왜 갑자기 음식을 가지고 오는 거야. 부담스럽게. 또 옆집에서 아이가 놀다 온다고 이야기하면 부모들은 폐 끼치게 뭘 놀다 오니 그냥 집에 있어 라던지 아니 학원 가야지 놀 시간이 어디 있어 라고 이야기해버린다. 혹은 잘 모르는 이웃에서 놀고 온다고 하면 괜한 걱정을 머리에 그리기도 한다.     


 우리가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에 열광하는 건 그만큼 따뜻함에 대한 결핍이 심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은 그러하지 못하니까. 지금은 각박하고 너무 살기 힘드니까 우리는 과거의 향수를 자극하는 무언가를 찾는다.      

 그러다 보니 지금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 사람들이 문제점을 느끼기 시작했다. 과거에 비해 경제적으로는 나아졌지만 형편 없어지는 그 이외의 것들. 상실된 것들을 찾기 위해 우리는 마을 공동체라는 개념을 다시 부활시켰다. 정부에서도 마을 공동체를 지원하기 위한 정책과 자금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마을 공동체라는 외피가 아니다. 결국 얼마나 마을 내 있는 사람들이 유기적인 유대관계를 맺느냐가 핵심이다. 이러한 유대관계가 단지 효율적으로 아이를 키우고, 경제적인 부담을 덜기 위해 시행되면 안 된다. 결국 똑같아져 버리니까. 그 안에는 사람의 정이라는 양념이 듬뿍 들어가야 한다.      


 지금 마을 공동체, 마을 기업들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고 정부자금 먹는 하마가 돼 버린 데에는 이러한 가치 철학의 부재가 한 몫하고 있다. 그래서 교육 기관들은 또 이러한 가치를 교육한다고 하는데, 그것도 사실 웃긴 이야기이다. 자연 발생적으로 생겨야 마땅한 인간적인 관계를 교육한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것인가. 이것은 너무나 작위적이며 속성으로 성과를 내기 위한 또 하나의 산업사회의 산물일 뿐이다.      


 우리는 조금 더 인간적이어야 한다. 산업 발전과 함께 숨겨져 있던 인간성을 발현해야 한다. 이것이 생활에 묻혀 제대로 보이지 않더라도 따뜻한 마음을 내는 연습을 해야 한다. 이것은 개인의 변화가 모여야 가능한 일이다. 좀 더 인간적인 세상을 위해 우리는 그렇게 노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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