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가장 큰 즐거움은 바로 여정이다
여행을 계획했다
여행을 계획했다. 계획이라고 별스럽게 마음을 먹은 것은 아니었다. 단지 오랜만에 이놈의 집구석을 떠나 가을바람이라도 쐬고 싶을 뿐이었다. 대체 어떤 바람을 쐬야 할까 망설이다가 갑자기 바다가 떠올랐다. 지중해의 에메랄드 색깔의 바닥이 훤히 보이는 바다를 잠시 동안 상상해보았다. 우리나라는 지중해가 아닌데 어디서 에메랄드 빛을 찾아야 하나. 이건 흡사 서울에 있는 양평 해장국집에 가서 양평 사람을 찾는 거랑 똑같은 일이잖아. 그리하여 이내 에메랄드 빛은 포기하고 말았다. 그럼 에메랄드 빛의 발가락이라도 따라갈 수 있는 데가 어디 있을까 하고 생각해보니 결코 서해바다는 아니었다. 그나마 우리에게 푸르른 바다의 잔상을 보여줄 수 있는 곳은 동해였다. 동해바다의 육덕진 파도가 무릇 보고 싶어 졌다. 그래 동해로 가는 거야.
동해 하면 길치인 내게 떠오르는 곳은 정동진밖에 없다. 정동진, 열차 타고 가면 금방이라던데 당장 갈 수 있지 않을까? 내비게이션으로 정동진을 검색해보았다. 소요시간 5시간 반, 우리나라를 평행하게 가로지르는데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다니.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생각보다 참 넓은 곳이었구나. 대체 이렇게 넓은 곳을 두고 그랜드캐년은 왜 찾아가는 거야. 그런데 말이다. 비행기 타고 5시간 반이면 세부나 지중해에 금세 도착하겠는걸. 하지만 이렇게 갑작스레 떠나는 여행에 비행기 자리를 내어주고 친절하게 기다려줄 수 있는 항공사가 어디 있겠는가. 전용기를 하나 구매하면 모를까.
그래서 그나마 조금 더 가까운 곳을 찾아보았다. 정동진을 갔다간 당일치기 여행이 힘들 듯했다. 내일은 일이 있으니까. 조금 더 가깝지만 충분히 육덕진 파도를 즐길 수 있는 그런 곳으로. 역시 우리에겐 네이버가 있으니까. 찾아보니 강릉이 나왔다. 블로거들의 강릉 사진 속 바다들은 저 멀리 에메랄드 빛을 띠고 있었다. 이곳이 내가 찾는 곳이란 말인가. 그런데 사진 앞에 이 껴안고 있는 커플들은 대체 왜 부둥켜안고 있는 것인가. 아무리 남녀가 원래 한 몸이었다고는 하지만 이 기분 좋은 가을 그렇게 까지 붙어있을 필요는 없잖은가.
쨌든 목적지가 정해졌다. 목적지가 정해지는 순간부터 마음은 설렌다. 그래 바로 이 기분이지. 생각해보니 별로 챙길 것이 없었다. 간단하게 옷을 차려입고 카메라 배낭을 하나 짊어지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지상 5층에 있는 집, 그리고 지하 2층에 세워져 있는 차. 통틀어서 일곱층의 이 거리를 이 날 세 번이나 왔다 갔다 했다. 여행을 앞두고도 이놈의 건망증은 항상 내 곁을 따라다닌다. 뭐 머리가 나쁘면 팔다리가 고생해야지 뭐 있겠는가. 여덟 시 반에 출발하기로 한 일정은 아홉 시로 늦춰지고 만다.
사의 찬미가 라디오에서 들려왔다
토요일의 거리는 그리 한산하지 않았다. 하늘의 표정은 곧 울 것만 같은데, 이 많은 인원들은 다들 어디로 가는 것인지. 운전을 하면서 무슨 노래를 들을까 고민을 했다. 오늘 하늘만큼 우울한데 말이지. 그러고 보니 예전에 어느 외국의 연구팀이 연구한 바에 따르면 슬플 땐 슬픈 음악을 들으라고 했다. 슬플 때 즐거운 노래를 들으면 이 세상에 나만 슬픈 것 같은 기분이 든다나 어쩐대나. 더 심각한 건 외국의 대학 연구팀들은 정말 희한한 것들을 많이 연구한다. 그것이 상상력의 발로일 수도 있겠지만. 뭐 우리는 그래도 일정한 가십거리를 얻을 수 있으니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다. 그래서 결정한 노래는 나윤선의 <사의 찬미>
광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이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에
너는 무엇을 찾으려 하느냐
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설움
웃는 저 꽃과 우는 저 새들이
그 운명이 모두 다 같구나
삶에 열중한 가련한 인생아
너는 칼 위에 춤추는 자로다.
잘 살고 못 되고 찰나의 것이니
흉흉한 암초는 가까워 오도다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세상
돈도 명예도 내 님도 다 싫다
노래 참 구슬프다. 노래에 맞춰 도로 위의 무거운 구름들이 낙하할 듯 말 듯 위태롭게 걸려있었다. 기류 사이로 목소리가 구름들을 이 쑤시듯 찌르고 있었다. 역시나 이 방법은 즉효란 말이지. 목소리 사이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한 방울 두 방울 후두두둑. 세상은 금세 눈물바다가 되었다.
비가 오는 날 운전은 위험하지만 낭만적이다. 춤추는 와이퍼 사이로 세상이 흠뻑 젖어 내린다. 아주 낭만적이지. 이런 날은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한잔 하면서 비 오는 창밖을 바라봐야 하는데 이놈의 핸들 때문에 품위 있게 아메리카노를 마실수가 없다. 게다가 어찌 이렇게 테이크아웃으로 구매한 아메리카노는 뜨거운지 신기할 노릇이다. 분명 머그컵에 있는 아메리카노는 먹기 좋은 따뜻함을 유지하는데 말이지. 그래서 결국 또다시 혀끝을 데어버리는 사고가 발생했다. 하긴 컵 뚜껑에 난 구멍은 작아도 너무 작다. 물이 쏟아지는 호스를 엄지손가락으로 외마디 비명을 지르게 눌러 물의 속도가 마하급으로 변하는 거랑 비슷한 이치겠지. 껍뚜껑 개발한 녀석에게 이 뜨거운 커피를 원샷 시키고 싶다.
혼자서 복작거리면서 가던 중 하늘이 조금씩 개인다. 그런데 비는 계속 내린다. 호랑이가 장가가는 날인가 여우가 시집가는 날인가. 오늘은 비가 오는 하늘과 햇살이 내리쬐는 하늘을 모두 경험하고 가는 운수 좋은 날이군 이라고 김첨지가 말할 것 같다.
오늘은 여정을 즐기기 위한 여행
여하튼 오늘의 최종 목표는 강릉이 아니었다. 목적지는 강릉 일지 모르겠지만 강릉은 단지 작은 나침반 역할을 할 뿐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여정’ 을 즐기기 위한 여행이었다. 여정을 즐기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중에 가장 큰 이유를 꼽으라면 단연코 운전이다.
운전을 하면 좋은점
운전하는 게 좋으냐고? 운전을 하는 게 좋았으면 택시기사가 됐겠지 이렇게 글 쓰고 사진 찍는 일을 직업으로 택하진 않았겠지. 운전을 하는걸 좋아한다라기 보다는 운전하면서 할 수 있는 것들을 좋아한다. 아니 운전하면서 다른 일을 하면 사고 나요 라고 누군가 이야기할지 모르나, 내 손은 당연히 얌전히 핸들을 붙잡고 있을 것이다. 내 발도 얌전히 액셀레이터와 브레이크를 순서대로 밟으며 안전운전을 할 것이다.
운전이 좋은 이유는 많은 생각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평소 때 아무것도 안 하고 앉아서 A라는 생각만 한다고 가정을 해보자.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스님도 아니니 기껏해야 5분에서 10분 정도일 것이다. 뭐가 그렇게 인내심이 없어 나는 한 시간도 앉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한 번 직접 해보자.
1분이 지나면 기가 막히게도 아흔아홉 가지 생각들이 머리를 스쳐갈 것이다. 평소 때는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생각들이 떠오른다. 내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 2분을 넘기면 1000가지 생각들이 목 뒤를 넘나들고, 뇌에 똬리를 틀며 뱀처럼 혓바닥을 날름거릴 것이다. 5분이 지나면 갑자기 안 쑤시던 다리가 쑤시기 시작한다. 오 중생들이여 아니 내가 중생이구나.. 10분의 시간 동안 앉아있었다면 일순간 대견한 생각이 들면서 그래 이 정도면 됐어 라는 탄성이 터져 나올 것이다. 그때 물어보고 싶다. 그래서 대체 넌 무슨 생각을 한 건데...
그렇다고 해서 삽으로 땅을 파면서 A라는 생각을 해보자. 땅을 봤다가 하늘을 봤다가 물한 모금 마시고 삽질을 서른 번 하다 보니 눈앞이 노래진다. 아 참 내가 무슨 생각 하려고 했었지. 고민 고민하다가 삽질도 못하고 생각도 못하고 끝나게 되겠지.
이에 반해 운전은 생각을 하기에 최적화되어있다. 만약 아리스토텔레스나 플라톤이 지금 시대에 태어났다면 운전 중 철학을 하지 않았을까. 지긋이 눈앞에 도로가 펼쳐져 지겹지도 않다. 메인 도로는 계속 반복되지만 주변의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은 우리의 시야를 지루하지 않게 해준다. 그렇다고 해서 꼭 그것에 집중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스쳐 지나갈 뿐이니까.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전방을 주시하고 오른쪽 다리로 엑셀레이터와 브레이크를 차례차례 밟아주기만 하면 된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운전을 하게 되면 적당한 초집중 모드가 된다. 그래 바로 이거야.
여정이 좋은 이유는 혼자 생각할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이다. 혼자 생각할 시간을 가지게 되면 생각이 깊어진다. 그렇다고 너무 많은 생각을 하면 안 된다. 생각이 깊어져야지 많아져서는 힘들다. 그것이 바로 여정의 핵심이다.
도착지의 정체성과 여정의 정체성은 다르다
그래서 결국 강릉은 도착했다. 하지만 강릉을 도착했던 건 이 글에서 중점이 아니다. 다만 하나의 가십거리일 뿐. 강릉은 강릉으로서 가진 정체성이 있는 거다. 도착지로서의 정체성. 나는 오늘 그 정체성에 대해 글을 쓴 것이 아니다. 그렇게 강릉에 도착하기 1분 전에 내 여행은 끝났다.
그 여행은 편안하고도 독립적이었다. 비록 기름값 10만 원을 도로에 쏟아붓는 기염을 토했지만 스쳐가는 바람과, 풍경과 생각들 그리고 여행에 대한 설렘 모두 좋았다. 이러한 여정의 즐거움을 아는 이들이 점점 사라져 가고 있는 것 같다. 예전에는 여정의 즐거움을 아는 종족과 결과의 즐거움을 아는 종족이 반반쯤 살았다면 산업사회가 발달하면서 세상이라는 커다란 기계가 어둠의 묘약을 뿌리는 덕분에 여정의 즐거움을 아는 종족들이 멸종하기 시작했다. 아마 그중에 내가 이 종족의 최후 1000명 중 한명이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우리 종족을 늘리기 위해 이렇게 글을 쓴다.
이번 가을은 여정의 즐거움을 만끽해보면 어떨까. 바로 당신.
PS. 오랜만입니다^^
요즘 글과 사진에 대한 많은 회의를 느꼈고
그에 대한 개인적인 연구(?)를 진행하느라 브런치에 뜸했네요.
역시 매번 자주 글을 쓰는건 쉬운건 아닙니다. 항상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