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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전 수필] 나는 멘토 시스템에 반대한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그릇을 가지고 있다

 







새는 알을깨고나온다. 2016 photobyhyeruu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 일명 <세바시>라는 프로그램이 인기를 얻고 있다. 15분간 성공한 이들이 나와 본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프로그램이다. 그들은 본인들이 살아온 역경과 그것들을 어떻게 이겨냈는지에 대해 담담한 어조로 혹은 격앙된 어조로 내뱉는다. 그들의 이야기에 방청객들은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깔깔대며 웃기도 하고 고개를 끄덕이기도 한다. 잠깐의 강의 시간이 끝날 즈음 그들은 강사에 대한 존경심과 본인들의 삶에 대한 작은 실망에 빠질지도 모른다.


 헬조선이라 불릴 만큼 현실은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취업은 어렵고 커뮤니티 게시판은 결혼과 육아를 포기하니 마니 하는 이야기들로 도배되어 있다. 과연 이 사회가 지금보다 나아질까라고 지나가는 이들 100명에게 물어본다면 그중에 8~90명은 아니오 그러긴 정말 힘들 거예요 라고 말하는 그런 시대가 도래했다.


 그러다 보니 멘토가 넘쳐난다. 멘토의 공급이 늘어났다는 것은 그만큼 수요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제 대학생들은 의례 멘토의 이야기를 듣고 그에 따라 행동하곤 한다. 그 근본적 원인은 난항을 겪고 있는 사회 구조적 문제이다. 이 어려운 세상에서 나를 구원해줄 누군가가 있다면 내게 답을 좀 주세요 라는 절박함은 우리나라를 멘토 천지의 세상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로 인해 타인의 꿈을 기반으로 수익을 창출시키는 직업도 생겨났다. 멘토링을 직업으로 삼는 이들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우리 한 번만 머물러서 생각을 해보자. 과연 그들의 조언이 진정으로 멘티들에게 도움이 될 것인가.

     



 멘토라는 단어가 처음 쓰인 것은 그리스의 대 서사시  <오디세이아>에서였다.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전쟁에 출전하면서 아들 텔레마코스의 교육을 그의 친구 ‘멘토’에게 맡긴다. ‘멘토’는 근 10년간 선생님이자 아버지이자 친구로서 텔레마코스를 돌봐준다. 이에 유래해 멘토는 한 사람의 인생을 지혜로 이끌어주는 이를 의미하게 된다.          

 너무나 훌륭한 의미를 지닌 멘토링. 그런데 과연 멘토가 해주는 조언이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

 멘토는 대부분 성공한 이들이 경험을 말해주며 시작된다. 이렇게 하면 너도 성공할 수 있어. 그런데 과연 우리는 그대로 하면 성공할 수 있을까? 만약 그런 공식이 있다면 이 세상에 성공하지 못한 이들이 누가 있을까.           

 멘토의 이야기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이다. 그러니까 그다지 공신력을 가지지 않는 내용이라는 말이다. 개인적인 이야기는 단지 하나의 이야기 혹은 참고사항이 될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이 곧 법은 아니다. 


 예를 들어 삼시세끼 고기만 먹고 10kg을 뺀 이가 앞에서 강의를 한다고 가정해보자. 그 이는 고기 예찬론을 펼칠 것이다. 제가 말이죠 탄수화물은 먹지 않고 하루에 꼬박 세 번씩 고기를 구워서 먹었단 말이죠. 그렇게 몇 달을 하다 보니 살이 10kg이나 빠져버렸어요. 여러분도 다이어트하고 싶으시죠. 이제 앞으로 매일 우리는 고기를 먹어야 합니다. 인간은 원래 육식동물이에요. 초식동물에 비해서 인간의 장은 매우 길이가 짧거든요. 그건 인간이 육식동물이란 증거예요. 그러니까 앞으로 여러분은 고기만 드셔야 합니다 라고 이야기했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할 것인가.


 과연 그가 정말 고기만 먹었기 때문에 10kg을 감량한 것일까? 혹시 중간에 매일 2시간씩 운동을 하지는 않았을까. 아니면 잠을 평소 때보다 한 2시간 정도씩 더 자지 않았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정말 애기손톱만큼만 고기를 먹은 건 아닐까. 


 이렇게 하나의 사실에는 너무나 많은 생략된 이야기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멘토의 입장에서 그 짧은 시간 동안 이야기를 하며 이러한 모든 부분을 이야기 하기란 사실 쉽지 않다. 그래서 대부분 시작과 끝만을 이야기한다. 이렇게 하였는 데 성공했다더라. 물론 그중에서 과정을 세세히 이야기하는 멘토들도 분명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삶의 모든 부분을 말로 다 옮길 수는 없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이를 듣는 이들에게도 있다. 사람의 머리라는 게 참으로 간사한 것이 자신이 듣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된다. 그러다 보니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더라도 그중에 기억나는 것은 강렬하게 뇌리를 스친 한두 가지 이야기에 불과하다. 결국 내용들이 왜곡될 가능성이 많다는 말이다. 그리곤 이렇게 믿는다.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멘토님 이시어. 저를 구원하소서. 이런 메시아니즘은 절대 개인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멘토 시스템에 찬성하는 편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멘토 시스템에 대해 그다지 찬성하는 편이 아니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개인적 조언의 주입은 타인에게 굉장히 폭력적이며 강압적 선입견을 부여할 수 있다. 모두 그렇진 않지만 강의 스타일에 따라 넌 이대로 해야 돼. 그래야 성공할 수 있어. 내 말을 따르지 않는 한 넌 성공하기 힘들어. 이렇게 강력하게 내리누르는 몇 마디의 단어들에 과연 몇 명이나 이를 거부하고 나는 내 삶을 살 거야라고 말할 수 있을까.


 둘째 각각의 환경과 가치관이 무시될 수 있다. 살아온 환경에 따라 추구하고자 하는 행복과 가치관이 다르다. 성공가도를 달리기를 원하는 이도 있지만 반복된 소소한 생활에서 행복을 추구하는 이들도 있다. 느긋한 삶을 살기 원하는 이도 있고, 타이트한 삶을 즐기는 이도 있다. 10년을 보고 사업을 시작하는 이도 있고, 1~2년 안에 빨리 성공해 다른 사업으로 갈아타려는 이도 있다. 물론 이에 대해서 적절한 조언을 받는 것은 상관없다. 그런데 멘토가 이러한 스타일에 대하여 지나친 조언을 한다면. 그것은 달을 보지 않고 손가락만을 보며 소리치는 겪이다. 게다가 이를 수용하는 이들도 본인의 스타일을 부정하고 멘토를 따라가 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러한 사태는 자칫 미래에 크게 후회할 일을 만드는 시발점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멘토 로부터의 조언은 매우 소극적으로 반영되어야 하고 수정된 조언이 되어야 할 것이다.      


 원래 아침잠이 많은 이들에게 아침형 인간이 무조건 훌륭한 거야라고 말한다고 해서 그들이 아침형 인간이 될 수 있을까. 오히려 기본 페이스를 망치고 기존에 잘 하던 일들도 실패하는 경우들이 생길 것이다. 과연 저녁형 인간 중에 성공한 이들은 없을까.      

 결과적으로 멘토의 조언은 실질적으로 내 삶에 도움이 되지 않을 확률이 높다. 그것은 모두가 다른 그릇과 내용물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보폭이 다른데 빨리 가라고 채찍을 맞으면 빨리 가진 못하고 엉덩이만 벌게지지 않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가 멘토가 되어야 한다. 우리에게 가장 좋은 멘토는 우리의 과거이다. 자꾸 넘어져야 한다. 깨지고 무너지고 죽지 않을 만큼 아팠을 때 체득하는 뼈아픈 경험이 가장 좋은 멘토이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는 그 뿌리가 같기에 도플갱어보다 훨씬 좋은 스승이 된다. 나이가 많이 먹었다고? 내년의 나보다는 어리지 않는가.      

 나이가 많다고 우물쭈물하는 사람들의 경우 내년이 되면 분명 올해 시작하지 못한 것에 대해 후회한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늦은 것일 수도 있지만, 남은 삶 중에서는 제일 빠른 순간이다. 간접경험은 직접 경험 위에서 힘을 발한다. 직접 경험이 일정량 채워지지 않으면 간접경험은 뜬구름 잡기다. 직접 경험을 통해 삶의 맥을 잡으면 비로소 받아들여야 할 간접 경험들이 눈에 보인다. 그리고 우리는 비로소 진짜 스승을 구할 수 있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오고, 우리는 매번 알을 깨는 수고를 해야 한다.


삶의 온전함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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