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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전 수필] 너의 이름은 2016

인연 그것은 만들어 가는 것




한 남자가 있다. 그의 머릿속에는 한 여자의 기억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 여자의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단지 꿈처럼 각인된 그녀에 대한 기억만이 어렴풋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렇게 몇 년의 시간이 흘렀다.


한 여자가 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한 남자의 기억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 남자의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단지 꿈처럼 각인된 그에 대한 기억만이 어렴풋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렇게 몇 년의 시간이 흘렀다.


남자는 머릿속 여자를 찾아 헤매지만, 그녀는 그 어디에도 없다. 그러다 우연히 탄 지하철 반대편 차량에 타고 있는 그녀를 한눈에 알아본다. 남자는 허겁지겁 다음 역에서 내린다.


여자는 머릿속 남자를 찾아 헤매지만 그는 그 어디에도 없다. 그러다 우연히 탄 지하철 반대편 차량에 타고 있는 그 남자를 한눈에 알아본다. 여자는 허겁지겁 다음 역에서 내린다.


그렇게 서로를 찾아 헤매던 남자와 여자는 작은 골목 계단길에서 조우한다.

그리고 남자가 감격에 겨운 눈빛으로 이야기한다. 


“우리 어디서 본 적 있죠?”

“..... 네 저도 그런 것 같아요.”

남자와 여자의 얼굴에는 비로소 눈물 머금은 미소가 번진다. 


<주의: 이 글에는 스포가 들어있습니다>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 남자와 여자의 기억은 우리 모두가 가졌을 거라 상상되는 전생의 흔적일지도 모른다. 그 전생은 다시 태어나 인연이라는 미명 하에 우리를 이어주고, 괴롭히고, 사랑하게 한다. 중국과 일본에는 붉은 실에 대한 전설이 있다. 사람이 태어나면 월하노인이 새끼손가락에 붉은색 실을 걸어 운명의 인연을 엮어 준다는 것이다. 이러한 실타래가 살면서 꼬이고 헝클어지기도 하지만, 운명의 인연을 만난 순간 이 붉은 실 때문에 알 수 없는 강한 끌림을 느낀다고 한다. 아마 우리나라의 삼신할매도 단순히 아이를 점지해주는 신(神)이라기보다는 이 월하노인처럼 운명의 인연을 만들어주는 역할을 했던 이가 아닌가 싶다. 이러한 운명의 인연을 우리는 단번에 알아볼 수는 없다. 수많은 고통의 혹은 인내의 시간을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흙속의 진주처럼 운명의 인연을 알아볼 수 있게 된다. 물론 공부하듯 노력한다고 해서 이러한 인연을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연을 만나게 되면 단번에 우리는 그것을 느낄 수 있다.  



피천득의 <인연>이라는 수필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어리석은 사람은 인연을 만나도 몰라보고,
보통사람은 인연인 줄 알면서도 놓치고,
현명한 사람은 옷깃만 스쳐도 인연을 살려낸다.

처음 피천득 시인의 글에서 이 대목을 읽었을 때 감탄을 금치 못했지만 살면서 느낀 점은 정말 운명의 인연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내용을 신해철은 본인의 노래 <Here I stand for you>에서 잘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위 이야기 속 남녀는 그렇게 서로를 알아보았다.


인파 속에 날 지나칠 때
단 한 번만 내 눈을 바라봐
난 너를 알아볼 수 있어. 
단 한순간에....


하지만 이렇게 단 한순간에 서로를 알아볼 수 있기 위해서는 그 시기 또한 중요하다. 아무리 인연이라 하더라도 적절한 시기를 맞추지 못한다면 그 또한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 되어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이를 우리는 <시절 인연>이라 부른다.


<시절 인연>은 원래 불교에서 파생된 용어이다. 씨앗이 싹을 틔우기 위해서는 햇볕, 온도, 수분 같은 각각의 조건들이 맞아야 가능한 일이듯, 깨달음도 이런 시절 인연이 닿아야 가능하다는 데에서 나온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인연 역시도 이와 다르지 않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신작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 2016>에서는 두 명의 남녀 주인공이 나온다. 도쿄에 사는 소년 ‘타키’와 시골에 사는 소녀 ‘미츠하’. 그들은 서로의 몸이 뒤바뀌는 꿈을 꾼다. 처음에 그들은 그것이 단순한 꿈이라고 생각하지만, 현실에서도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면서 서서히 그것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다 어느 순간 더 이상 몸이 바뀌지 않자 타키는 미츠하를 찾으러 나선다. 하지만 그들의 시절 인연은 어긋났다. 한국영화 <동감>에서 1979년 살고 있던 여자 주인공과 2000년에 사는 남자 주인공이 낡은 무선기로 서로의 인연을 갈구하듯이 그렇게 <너의 이름은>에서도 서로의 시절은 어긋나고 있었다. 미츠하가 살고 있는 세상은 타키가 살고 있는 세상보다 3년 전의 세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3년 전 미츠하가 살고 있던 마을은 별똥별이 떨어져 수많은 사망자를 남기고 폐허가 되어버린다. 더 이상 몸이 바뀌지 않았던 시기에 미츠하는 죽음을 맞이했던 것이다. 타키는 이를 되돌리려 한다. 




 무녀 집안이었던 미츠하는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의식으로 신성한 술을 만든다. 이 술은 처녀가 신성한 물을 머금었다가 뱉으면 그것이 타액과 섞여 자연발효되면서 만들어지는 술이다. 이 술은 미츠하의 또 다른 분신으로 신전에 바쳐지곤 한다. 타키는 몸이 바뀌지 않자 지금은 폐허가 된 신전을 찾아간다. 그곳에는 3년 전 미츠하가 만들어놓은 술이 있다. 타키가 그 술을 마시는 순간 사고가 있던 전날의 미츠하의 몸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타키는 인연을 지키려 노력한다.


 애니메이션에서 그들을 실제 이어준 매개체는, 타키의 손목에 감겨있던 붉은 천이었다. 그것은 인연을 의미한다. 그런데 과연 타키와 미츠하를 마지막 작은 골목 계단길에서 만나게 해 준 것은 단지 붉은 천만이었을까. 시작은 어찌 되었건 둘의 인연이 연결된 것은 타키와 미츠하의 의지일 것이다. 우리 역시도 인연을 만들어가는 건 모든 당사자들의 몫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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