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온도를 맞추는 일은 중요하다
우리는 여행을 떠날 때 동행을 한다. 홀로 떠날 때는 고독과 함께, 둘이 떠날 때는 정다운 이와, 셋 이상은 왁자지껄한 즐거움이 함께 한다. 보통은 각자의 취향에 따라 여행을 준비하고, 동행길을 함께할 누군가를 정한다.
그중에서도 둘이서 여행을 간다는 것은 단어만큼이나 정겹다. 둘이서.. 너랑 나랑.. 이런 단어들의 쓰임의 바탕에는 상대방에 대한 애정과 아련한 그리움이 있다. 초등학교 시절 우리는 짝꿍과 둘이서 오손도손 추억을 공유했다. 어른이 되어서도 단짝 친구 하나 정도는 있어 특별한 '둘이서'를 유지한다. 그리고 결혼을 하면 남은 인생의 '둘이서'가 형성된다. 그래서 둘이 가는 여행은 특별하지 않은 이와 함께 가기 힘들다. 각자의 온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관계에도 온도가 있다. '둘이서'의 온도는 서로가 같아야 한다. 한쪽의 온도가 차갑거나 식게 되면, 둘이서는 미지근해진다. 식어버린 커피처럼 향이 날아가 버린 관계는 '둘이서'라는 애틋한 단어로 부르기에는 이미 많이 벗어나 있다. 그때는 오히려 다른 누군가를 참여시켜 셋이나 넷이서 가는 것이 좋다. 그래서 둘이 여행을 간다는 것은 매우 특별한 일이다.
관계에도 온도가 있다
이렇게 특별한 여행길에 오르게 되면 꽤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거나, 신이 나서 방방 뛸 것 같지만 사실 그러하지 않다. 둘이 같이 여행길에 오르기 위해서 그들은 수많은 세월을 공동작업 해왔다. 어색함에 익숙함을 덧칠하여 만들어진 한편의 작품은 그들 고유의 화풍을 가지고 있다. 그들만의 방식으로 만든 관계의 붓은 밥로스의 그림처럼 쉽게 만들어지기도 하고, 고흐처럼 시대의 인정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 둘은 그 작품을 좋아한다는 점이다. 그들만큼 그 작품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이들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둘이 가는 여행길은 초반을 제외하곤 별 할 말이 없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상대방에 대한 어색함이나 관심 없음이 아니라 작품에 대한 설명이 굳이 필요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둘이서 여행을 가게 되면 오롯이 여행지에 집중할 수 있다. 안개 낀 바람, 비에 젖은 나무, 스쳐 지나가는 풍경, 머물러 있는 풍경, 말없이 옆에 있는 그대. 모든 것들이 제자리에 있을 때 느껴지는 안락한 아름다움. 이 모든 것을 충분히 음미하고 느낄 수 있다. 그것은 평온하고 아름다우며 서로를 아름답게 만들어준다.
'숲'스러운 관계는 관계의 온도를 더욱 높인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어색하지 않은 관계. 그것은 굉장히 이상적인 관계이다. 숲에 서 있는 나무들처럼. 그들은 모두 숲에 있지만, 각자 독립적으로 깨어 있다. 하지만 그들이 모여 숲이 된다. 하나가 모여 전부가 되고, 전부는 하나를 위해 존재하는 관계. 그 관계는 '숲'스럽다.
'숲'같은 관계는 발음 그대로 시원한 소리가 난다. 'ㅅ'을 발음할 때 윗입술과 아랫입술 사이에서 부는 상쾌한 바람과, 기분 좋게 이 모든 것을 다 품을 'ㅍ'의 발음은 신선하고 아련하다. '숲'스러운 관계도 그러하다. 둘 사이에 상쾌한 바람이 불어와 미소 짓게 하고, 그 미소를 가득 머금은 채 놓아주지 않는다. 안으로 갈무리하면 둘 사이의 관계의 온도는 적정해진다. 자 이제 따뜻하니 몸을 한번 담가볼까.
우리는 모두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관계 자체는 아무 힘이 없다. 관계의 온도를 맞추기 위해서는 관계를 맺은 이들이 얼마나 덧칠을 하느냐이다. 자신이라는 붓을 들고 생소한 공동의 캔버스 위에 서로서로 덧칠을 하다 보면 각자의 색은 사라지고, 캔버스는 무채색이 된다. 색이 없는 무채색 그것이야 말로 관계의 핵심이 아닐까. 아무것도 전제되어 있지 않고 아무 조건 없이 무채색으로 시작하는 관계. 그 관계야 말로 건강하고 아름다운 관계가 아닐까.
사진/글: 신상천(hyeru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