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포 장릉에서 만난 봄
‘입춘(立春)’의 입김 뒤로 ‘경칩(驚蟄)’이 찾아왔다. 동장군의 강인한 춤사위 사이로 생동하는 만물은 매년 감동스럽다. 계절이란 망치와 시간이란 끌은 자연이라는 예술작품을 조각한다. 그 감동의 순간을 담아내는 것은 사진가의 몫이다. 아직 조금은 이르지만 움이 돋아나는 계절의 한 조각을 담아보았다.
3월의 장릉은 겨울과 봄이 섞여 있다. 흙에서 피어난 설화(雪花)가 지고 가지엔 춘몽(春夢)이 피어나고 있었다. 앙상한 가지들 사이로 고요한 생명의 용트림이 느껴졌다. 새순들 사이로 나지막이 오후 햇살이 걸려있었다. 아직 완전체가 되지 못한 봄, 그 미완의 미(美)는 더더욱 오묘하여 사람들의 심장을 뛰게 한다. “성큼성큼 다가오니 심쿵심쿵.”
땅바닥엔 도토리들이 뒹군다. 이들은 가끔씩 돌아다니는 청설모의 먹이가 되었을 수도, 식탁의 도토리묵이 되었을 수도 있다. 또 누군가에게는 추억의 매개체가 되었을 수도 있다. 그들은 각자의 역할을 끝내고, 다음 계절을 준비하고 있었다. 봄 햇살을 머금은 그들은 인간이 삶을 기록하듯, 그들의 삶을 기록해내고 있었다.
개여울은 이제 막 녹아 물이 흐르고 있었다. 겨우내 꽁꽁 얼었던 물은 봄바람에 흩날려 그 속살을 모두 드러내고 새초롬한 봄처녀처럼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졸졸거리는 물 사이로 걸려있는 솔방울은 겨울 한철 변하지 않은 지조의 기록을 설(說)하고 있었다. 그것은 현자가 무저갱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중생들에게 일갈하듯 고요하고도 우렁찼다. 봄은 아름다웠지만 솔방울은 찬란했으며, 그들은 봄의 한 배역을 맡아 열연하고 있었다.
한 켠에서 누군가 또 다른 봄을 담고 있었다. 세밀화와 일러스트를 그린다는 그녀는 작은 붓과 마음으로 봄을 그리고 있었다. 그녀의 봄은 카메라가 담는 장릉과는 달랐다. 셔터 끝의 사실적 봄은 붓끝에서 조금 더 몽환적으로 창조되고 있었다. 사진이 뺄 샘의 미학이라면 그림은 더함의 미학이다. 카메라는 봄을 단순화시키려 했으나 그녀의 봄은 붓끝에서 조금씩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그녀의 봄은 완성되었다.
저 너머 엄마가 아이들의 사진을 찍어주고 있었다. 아이들은 둘이서 얼굴을 맞대고 연신 브이를 해댔다. 국민 사진 포즈라고 일컫는 브이는 대체 누가 매번 가르쳐주는 걸까. 아니 가르쳐주지 않아도 어떻게 저렇게 매번 같은 포즈를 취하는 것일까. 하지만 그들의 브이는 따뜻했고 행복해 보였다. 엄마는 조금 더 아이들을 예쁘게 찍어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닿기라도 한 듯 위에는 무지개가 펼쳐졌다. 이 완벽한 한 컷은 우리네 가슴속 가족에 대한 기억이며 환상이며 행복이다.
그렇게 봄은 우리 곁에 다가왔다. 잠깐 동안 느껴본 봄이었지만 봄은 여느 계절과는 다른 무엇이 있다. 아마 거센 추위의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어 더더욱 그럴 것이다. 다들 바빠 봄을 직접 본다는 일이 쉽지만은 않는 요즘이다. 그래도 사진을 통해서나마 그것들을 느낄 수 있음은 큰 축복이다. 봄의 전령으로써 사진가는 그 의무를 다 한다. 하지만 이번 봄 주변을 거닐어보며 봄을 직접 만끽해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