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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지혜로운 자의 죽음. 그것은 죽음의 초월이다 



 만약 우리에게 죽음이 예정되어 있다면 남은 시간 무엇을 해야 할까. 몸이 너무 안 좋아 병원을 갔더니 이런저런 검사를 다 해보라고 한다. 시끌벅적한 인파들 사이에서의 외로움. 혹시나 큰 병이면 어떡하지. 그럴리는 없겠지. 수많은 생각들이 밀려오는 대기실 의자. 주변의 웅성거림 사이로 대기 순서가 나오는 전자 전광판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띠링, 띠링 전자 전광판에 새로운 이름들이 올라온다. 소리가 날 때마다 날카로운 신경이 뇌를 긁는다. 영겁의 시간이 흐른 후 비로소 내 이름이 불린다. 네. 대답을 하고 의사와 면담을 하기 시작한다. 최대한 평온한 얼굴을 유지하려는 의사의 표정이 언뜻 보인다. 


 "대략 3개월 정도밖에 시간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의사의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귓가를 울린다. 귀에 이명이 온 듯, 깊은 심해에 들어온 듯 아득해진다. 가슴에 있던 심장이 심연의 끝까지 쿵하고 떨어진 느낌이다. 아.. 그렇구나 난 이제 3개월밖에 살 수 없구나.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드라마가 끝날때까지만 살아있게 해주세요


 지난 9일 배우 김영애가 췌장암으로 별세했다. 향년 66세의 젊다면 젊은 나이에 죽음의 성으로 초대를 받았다. 김영애는 투병 당시 KBS2의 월계수 양복점 신사들의 마지막 촬영을 마쳤다. 김영애는 촬영 초반 "나는 월계수 양복점 신사들 50회가 끝날 때까지만 살아 있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드렸어요."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또한 김영애 씨는 마지막 4개월 여를 입원한 상태에서 촬영에 임했는데, 녹화날에는 정신을 맑게 하기 위해 진통제도 맞지 않았다고 한다.


레테의 강을 넘기전 마지막 숙제였을까

 아파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진통제를 맞지 않는 시간들이 얼마나 괴로운지. 정신을 맑게 하기 위해 진통제를 맞지 않았다고 했지만, 진통제를 맞지 않으면 맑던 정신도 고통으로 희미해진다. 고통이란 그런 것이다. 외부 위험에서 보호하기 위해 신은 인간에게 고통이란 선물을 주었지만, 고통은 인간을 피폐하게 만든다. 아니 어쩌면 삶이 피폐해질 정도로 고통을 받는다면 그건 쓰임을 다했다는 통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죽음이란 것이 그리 쉬운가. 그래도 인간은 벗어나고 싶다.

 김영애 씨의 마지막 영상을 보니 많이 수척했다. 한걸음 한걸음 옮기는 발걸음이 쇳덩이를 짊어진 듯했다. 하지만 그녀는 마지막 녹화를 끝냈다. 그녀에게 연기란 무엇이었을까.


 레테의 강을 넘기 전 마무리 지어야 할 숙제였을까. 강을 건너기 전 삶은 어떻게든 마무리해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마무리할 것인가. 

 얼마 전 법륜스님의 이야기가 뇌리를 스친다. 시한부 인생이 남았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느냐의 질문에 스님은 대답했다. 우리가 모두 오래 살 거 같지만 내일 당장 죽을 수도 있는 인생이다. 아무리 건강해도 길을 걷다 차에 치이면 그대로 죽을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시한부 인생 선고를 받았다고 해서 지금 현재 살고 있는 이들과 다른 것은 없다. 그런데 왜 남은 삶을 불행하게 보내려고 하느냐.

 

우리는 모두 언제 죽을지 모른다

 결국 이것은 선택의 문제이다. 남은 삶을 행복하게 보낼 것이냐 불행하게 보낼 것이냐는 순전히 개인의 문제이지 환경의 문제는 아니다. 남은 날들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고 행복해질 수 있다. 이것은 마음 한번 돌이키면 될 문제이다. 하지만 마음 한번 돌이킨다는 것이 천년의 세월을 살아내는 것보다 힘들다. 하지만 시시각각 그러한 마음을 다잡아야 하지 않겠는가.  평소에도 마찬가지이다. 살면서 우리가 받는 스트레스는 모두 우리의 마음가짐의 문제이다. 스트레스를 주는 것도 내 생각, 받는 것도 나일뿐인데 우리는 원망할 상대를 찾는다. 어찌 보면 그것이 더 마음 편한 일일 수도 있기 때문에. 하지만 그래서는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 않는다. 매번 누군가를 원망하는 자신만 남게 된다. 상대를 원망하고 세상을 원망하고, 그러다 마지막은 이런 스트레스를 받는 자신을 원망한다.

 우리는 언제 죽을지 모른다. 그런데 그렇게 누군가를 끊임없이 원망하며 산다. 이것이 부질없음을 깨달을 즈음이 미 죽음을 앞두고 있다. 왜 우리는 이런 삶을 살아야 할까.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삶에 관대해져야 한다. 둥글둥글. 둥글어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죽음이 오더라도 할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드는 것이 좋다.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듯 내일 죽음이 찾아오더라도 할 수 있는 것. 그것을 인생에서 만들어 놓는 것은 인생의 가장 좋은 숙제이다. 과연 내일 죽음이 찾아온다면 나는 오늘 무엇을 할 것인가.   


지혜로운 자의 죽음, 그것은 죽음의 초월이다

 배우 김영애 씨는 죽기 전 본인의 영정사진과 수의 등을 모두 준비해 놓았다고 한다. 그녀는 이미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어찌 마감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연기에도 드러났지만 그녀는 지혜로운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죽음을 초월했고, 삶과 죽음이 정말 다리 하나 건너는 일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지혜로운 자의 명복을 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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