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아지지 않는 날 데리고 산다는 건

현대인들은 정신병 하나쯤은 달고 살잖아요?

by ㅇㅈㄹ


밍기뉴의 〈나아지지 않는 날 데리고 산다는 건〉을 들으며 쓰는 글.


참으로, 나아지지 않는다.

나의 과잉 독립성, 인정욕구, 과한 책임감, 회피형 애착, 완벽주의 성향.

지금 내 이어폰에서 들리는 아이유 버전의 〈네버엔딩 스토리〉처럼, 정말 네버엔딩이다. 네버엔딩!


한국인, 일본인들이 챗GPT를 심리상담사로 쓰는 경우가 많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도 한 번 써봤다. 마음이 나아지지 않을 때마다 “나 왜 이래?”, “심리적으로 분석해봐” 물었더니 GPT 왈 —


당신의 심리는 회피형 애착과 인정욕구의 갈등이 핵심입니다. 엄마에게서 느낀 억압과 의존을 피하려다 보니 관계에서 철저히 독립을 추구하지만, 마음속에서는 누군가에게 “나를 그 자체로 좋아해 달라”는 욕구가 여전히 존재합니다.

이 두 가지가 서로 부딪히며, 겉으로는 쿨하고 독립적인 척하지만 속으로는 인정과 사랑을 갈망하는 이중성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 갈등을 완화하기 위해서는 의존을 조금씩 허용하는 연습과 자신의 인정욕구를 솔직하게 받아들이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럼 나 어떻게 할까?”를 물었더니 GPT 왈 —


너는 단순히 “그건 네 통제 밖이야”라는 말로 위로 받는 타입이 아니고, “그럼 난 뭘 할 수 있지? 어떤 행동으로 전환하지?” 를 찾아야 마음이 안정되는 사람이야.

너가 하고 있는 글쓰기 같은 건 크게 보면 “승화(sublimation)” + “인지 재평가(reappraisal)”야. 즉, 불안을 그냥 견디는 게 아니라, 새로운 창작 원료로 바꿔서 자기 주도성을 되찾는 방식이지.


그래 알겠다. 나아지지 않는 날 창작 원료로 바꿔서 자기 주도성인지 뭔지를 되찾아보자 한 번. 그래서 써 본다. 이 놈의 네버 엔딩 스토리가 어디서 부터 시작됐는지 한 번 써보자 이거야. 때는 중딩 2학년, 어렴풋이 기억나는 중딩 15살 ㅇㅈㄹ은 외쳤다. 나 20살만 되면 무조건 독립 할거야! 내 꿈은 독립이야!


이놈의 기지배 니가 나가 살아봐야 고생하는거 알지, 복에 겨운 소리를 하고있네! 그래 나가라 이 기지배야! 하는 엄마에게 울 언니는 그랬단다 “엄마 그러면 쟤 진짜 나가, 그러니까 그런 말 하지마”


중딩 ㅇㅈㄹ은 알았을까? 너의 꿈, 나의 독립 네 나이 만 32살이 되어서야 이억만리 미국에서야 간신히 이뤘다고. 너의 첫 독립은 미국에 그 유명한 동네 엘에이에 있는 어떤 아파트에 10평짜리 원룸이라고. 15살의 ㅇㅈㄹ이 이 얘기를 듣는다면 3가지 포인트에서 아마 까무러칠거다.


첫 번째, 나의 독립이 그렇게 늦어졌다고? 32살까지(한국나이 34살)까지 나 독립 못했다고?

두 번째, 그럼 그렇게 20대 내내 엄마랑 살았다고? 미쳐써 어떠캐 버텼대?

세 번째, 게다가 미국에 가서 혼자 산다고? 무슨소리야 나 영어 진짜 싫어하는데?? 나 영포자인데?


미국의 한 카페에 앉아 왜 만 32살의 내가 나아지지 않는지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다가 어릴 적 소녀의 꿈까지 되돌아 보다니, 참 인생이 아이러니하다.


20대 때도 독립 독립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 혼자 사는 것에 대한 막연한 로망이 있던 10대를 지나 현실을 깨닫기 시작하는 20대. 새롭게 안 사실이 있었다. 같이 살면서도 같이 살지 않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20대 ㅇㅈㄹ 피셜 3대 독립이 있었다. 물리적 독립, 경제적 독립, 심리적 독립. 자의적 타의적 물리적 독립을 포기했던 20대, 나는 전략을 바꿨다. 경제적 독립과 심리적 독립을 먼저 이루리라.


심리적 독립을 이루기 위해 강박에 가깝게 누군가에게 의존하는 것을 경계했고 뭐든지 혼자서도 할 줄 알아야한다고 생각했다. 주 양육자와의 불안정 집착형 애착관계는 심리적 독립을 넘어 과도한 독립성 강박이라는 부작용을 일으켰지만 그래도 반쪽자리 심리적 독립은 한 줄 알았다.


사회인이 되고 나서는 부모님께 손 벌리지 않고 생활비 용돈 드리면서 내돈내산으로 모든 것을 해내는 경제적 독립을 이뤘다. (부모님 집에 살았으니 완전한 독립은 아니지만, 생활비 드렸자나...)


그리고 나서 이제 진짜 물리적 독립을 선언했을 때, 그 누구도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 고생했다. 할 때 됐지. 그래라 그럴때도 됐지. 이제 이제 진짜 가거라.


돌이켜보면 내가 원했던 독립은 단순히 혼자 사는 것이 아니었다. 그건 얽매이지 않는 것이었다. 공간이든 돈이든 사람이든, 무엇인가에 얽매여서 내가 컨트롤 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는 것. 그것이 내가 가장 경계하는 것이었다. 누군가에게 너무 의지하면 안돼. 그러면 내 컨트롤을 잃어버리니까. 혼자서도 잘해야해. 혼자 할 줄 알아야해. 혼자서도 살아갈 줄 알아야해.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울어는 아니지만, 울더라도 혼자 울어야지. 아마 여기에 나의 과잉 독립성의 단서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내가 사람 싫어! 인간은 아니다. 혼자에 대한 미친 강박은 하나의 방어기제다. 사실 혼자가 아니라 스스로 하는 것에 대한 강박이다. 마음이 불안정하고 스트레스 받을 때 나타나는, 그래서 사람좋아 리트리버처럼 사람들을 막 만나고다니다가도 어느순간 아 너무 과했다. 지금의 상황들이 내 컨트롤안에 들어와 있지 않다. 라고 느끼면 방어기제가 나온다. 혼자 있어야해. 혼자서도 잘해야해. 너무 이렇게 의존하면 안돼. 요즘 걔 너무 자주 봤지? 이러면 안돼. 아 내가 걔한테 너무 마음 줬지? 그러면 안돼. 이렇게 너무 좋아하면 안돼. 너무 마음을 주면 안돼. 독립적으로 살아야해. 한 사람에게 너무 많은 역할을 줘서 그 사람없이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 처럼 되면 안돼.


그래서 그랬나. 오래 만났던 전 연인은 나한테 그랬다. 너는 내가 뭘 하든 상관 없잖아. 그래서 그랬나. 오랜 친구는 나한테 그랬다. 너는 그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거라고. 네가 정말 그를 사랑한다면, 그렇게 두지 않을 거라고. 글쎄, 잘 모르겠다.


과한 책임감의 단서는 따로 찾을 필요도 없다. 나를 너무나 의지했던 나의 엄마. 나를 너무 사랑했던 우리 엄마. 너무하게 사랑해버렸던 우리엄마. 그 불안정한 애착은 나에게 과한 책임감과 죄책감을 남겼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기 어렵다. 마음을 주면, 모든 게 내 탓이 되니까. 엄마의 외로움도, 연인의 불안도, 다 내 탓 같으니까. 그래서 나는 나보다 더 ‘잘난 사람’을 찾는지도 모르겠다. 그 사람에게는 내가 뭘 해주지 않아도 되니까.


최근에 어떤 사람이 나에게 그랬다. '널 처음 봤을 때 참 사랑 많이 받고 자랐다고 생각했어.' 겉으로는 아 그래용? 홍홍홍 했지만 속으로는 '하 니가 뭘알아? 사랑 너무 많이 받아서 탈이다 이 새꺄'라고 생각했다.


너무하게 사랑받고, 너무 의존받았던 시간은 아이러니하게도 ‘인정욕구’로 발현됐다. 그렇게 사랑받았으면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없어야 하는 거 아닌가? 나도 이해가 안 됐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필요한 존재였던 기억”이 도파민 루프(dopamine loop)가 된 게 아닐까. 벗어나고 싶지만, 또 ‘필요로 되는 감각’이 달콤해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난 심리 전문가가 아니라 모른다 그냥 뇌피셜 해볼뿐)


내가 가장 견디기 어려운 '나아지지 않는 나'는 '회피와 인정욕구가 결합된 종합선물세트'다. 그래서 관계에 수동적이 된다. 과한 책임감을 느끼고 싶지 않아서 더이상 다가가지 않을거지만, 너에게 인정 받고 싶으니 너는 다가와야해. 그렇지 않으면 너는 나를 사랑하는게 아니야.


이 미친 인정욕구는 곧 과한 책임감과 완벽주의 성향으로 이어지고 내 탓의 절정으로 가버린다. 그러다가 이러면 안돼 혼자 잘해야지 과잉 독립성이 도지고 회피로 도망치는 ㅇㅈㄹ만의 도파민 루프에 빠지고 나는 또 다시 '아.... 나아지지가 않아!!!!'를 외치고야 만다.


그래서 이 글의 결론은

결국 난 나아지지가 않는다는 거다.


뭐 그렇다.


글쎄, 챗 GPT의 추천대로 이렇게 두서없이 속을 다 까발린 글을 쓰고 발행해보려한다. 사람은 자기만 보는 일기에도 거짓말을 쓴다는데, 이건 정말 솔직하게 썼다. 근데 이 글을 보고 누군가 “뭐야, 이 여자?” 하고 나를 떠난대도 후회하지 않을 것 같다. GPT 말대로 약간 승화?되고 인지 재평가?한 것 같기도 하다. 뭔가 굉장히 미뤄둔 어떤 일을 한 것만 같은 기분도 든다. 그게 뭔진 정확히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 글의 결론이 '그래서 저는 나아졌습니다'라는 해피엔딩은 아니지만, 나아지지 않는 날 데리고 살기 위해서, 사실은 쉽게 나아지지 않을 나를 잘 데리고 살아가기 위해서, 나중의 내가 읽고 너 나아졌어. 라고 말해주길 바라면서 -


발행 꾸-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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