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여간의 영상 프로젝트 후기 (2021년 8월 저장 글 재발행)
담당하고 있는 글로벌 클라이언트의 꽤나 큰 영상 프로젝트를 지난주에 완전히 마무리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잘 끝났다. 담당자도 맘에 들어했고, 담당자의 상사들도 맘에 들어했고, 고객사 내부에서는 호평을 받았고 조회수도 (광고지만) 나름대로 잘 나오고 있다.
하지만 지난 한 달 동안 나는 온갖 압박에 시달리며 결국 업무 관련 악몽까지 꾸는 지경에 이르렀다. (원래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면 관련 꿈을 꾸기는 하는데, 이번엔 역대급이었다) 지난 5년여간 홍보회사에서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영상 프로젝트도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유난히 힘들었던 이유가 뭘까. 나는 더 성장하고 노련해졌는데 왜 이렇게 힘들었을까 계속해서 생각했다. 이 기회를 발판 삼아 한 단계 나아가고 싶었다. 다음에 또 이런 상황이 된 다면 그때는 덜 스트레스받고 싶으니까.
1. 나의 역할, 우리는 제작자가 아니라 ‘커뮤니케이션’하는 사람이다.
모든 에이전시가 그렇겠지만, 우리는 중간자적인 입장이다. AE의 사전적 의미는 account executive로 광고주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일련의 모든 과정을 책임지고 처리, 기획하는 직업이라고 한다. 그렇다 보니 A...ㅏ.. 그것도 제가 하나요? Eㅔ... 그것도 제가 하나요? 하는 밈도 탄생한 거지. 이번에도 나의 역할은 클라이언트와 프로덕션의 사이, 그 어드매쯤.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바를 모두 다 이뤄내야 함과 동시에 또 프로덕션의 편이어야 하기도 하는, 그런 사람. 우리 일을 오래 하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많은 친구들이 이런 역할에서 오는 현타를 이겨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나름 그동안 중간자적인 역할을 잘한다고 생각도 했었고, 나는 ‘제작’이 아니라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해왔었기 때문에 나름대로 직업에 대한 이해도는 높은 편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번 프로젝트에서는 이런 나의 역할에서 처음부터 포지셔닝을 제대로 가져가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부터 너무나 갑작스럽게 프로젝트가 진행되며 흔히 말하는 R&R을 나 자신이 명확하게 하지 못했고, 그 과정에서 나 혼자만의 스트레스가 많이 깊어졌다. 그렇다 보니 클라이언트에게도 프로덕션에도 끌려다니는 스탠스가 자주 나왔다.
2. 무소의 뿔처럼 실무 하지 말고, 돌다리도 두 번 세 번 두들겨 보고 시작하자. 이미 반절쯤 건넜을지언정
사실 그런 스탠스가 나오게 된 건, 결국 예산과 업무 스콥을 명확하게 매듭짓지 못하고 일단 프로젝트를 진행했던 것에서 비롯됐다. (근데 사실 이건 내 잘못만도 아니다) 모든 일을 할 때 클라이언트가 명확하게 하지 않는 부분에 있어서 AE가 더 명확하게 짚고 넘어가야만 한다는 것을 더욱 뼈저리게 느꼈던 프로젝트였다. 처음에는 50 정도의 레퍼런스를 보여주며 예산을 깎아 달라고 했던 그들이, 결국에는 250 수준의 무엇인가를 원하고 있는 상황이 발생해 버린 것이다. 50 정도로 합의를 보고 업무를 진행하던 도중 어? 이거 70인데..? 싶은 생각이 드는 순간, 나의 촉을 무시하지 말고 브레이크를 걸었어야 했다. 생각보다 브랜드 담당자들은 결과물만 보기 때문에 과정에 대한 이해가 낮은 경우가 왕왕 있다는 것을 내가 망각한 것이다. 아 저 사람도 이게 70이라는 것을 알고 말하는 거겠지?라는 안일한 넘겨짚음이 오히려 나에게 큰 스트레스로 돌아와 버렸다.
결국에는 급하게 업무를 진행하다 보니 처음 예산대로 계획했던 것보다 업무량은 늘었고, 말도 안 되게 온에어 일정까지 당겨지며 프로덕션에서도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와버렸다. 어찌 보면 이 부분은 내가 정말 방치 아닌 방치를 했었다는 생각까지 든다. 이거 뭔가 70인데 하는 순간, 그들에게 브레이크를 걸어야만 하는 것. 그것이 1에서 부족했던 나의 스탠스고 결국 예산 문제까지 불거지게 만든 것이다.
이 같은 나의 업무 습관은 내부에서도 나의 상사에게 피드백받은 부분이기도 하고, 매니저로서 나의 단점이기도 하다. (실무 할 때는 최고 장점이었지...) 아직은 실무에 더 익숙하다 보니 일단 일이 주어지면 일단 시작하고 보는 것. 앞으로 매니저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내가 꼭 고쳐야 하는 습관이다. 어쩔 수 없이 떠밀려 오다 보니 다리를 반절 넘게 만들고 있더라도, 그래도 그때라도 한번 더 두들겨 보자. “아니 이거 나무다리 만들라고 하셨는데, 지금 거의 돌다리 만들고 있잖아요!”라고 말해야 하는 순간이 분명히 온다. 그 시기를 넘겨 버리면 우리는 모두 꼼작 없이 돌다리를 완성해 버리고 말 거다. (돈은 똑같이 받고 말이야)
3. 클라이언트와 제작사 사이, 앵무새가 될 것인가 조율자가 될 것인가.
가끔 이 일을 하다 보면 정말 의미 없는 ‘대행’만 하고 있는 것 같은 친구들이 있다. 고객사의 말을 그대로 벤더에게 옮기기만 하고, 벤더의 말을 그대로 고객사에 옮기기만 하고. 가끔은 그게 더 효율적일 때도 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우리는 커뮤니케이션이 직업인 사람들이니까. 그래서 나는 항상 벤더에게 혹은 우리 디자인팀에게 피드백을 줄 때 시간이 좀 걸린다. 고객사의 피드백을 거르고, 정리해 벤더가 잘 해낼 수 있게, 결국에는 고객사가 원하는 결과물을 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마치 교열을 하듯 정돈의 시간을 가진다. 이 것이 내가 생각하는 나의 장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내가 과연 이 부분을 잘 해냈는가?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고객사의 피드백을 그대로 전달하지 않고 뺄 건 빼고 할 건 하고자 나름대로 많이 필터링을 거쳤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프로덕션에서는 다소 과도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피드백을 한 번에 주지 않고 쪼개서 주는 듯한 느낌이 많이 들었던 것 같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1) 처음부터 1,2차 시사의 완성도를 어느 정도 가져갈 것 인가 명확하게 했어야 했고 2) 일정과 예산상 고객사가 피드백 거리를 생각할 때 이 거는 반영이 안 되겠다 하는 부분들을 사전에 인지 시켰어야 했다.(안되더라도 말했겠지만)
사실 이것도 2에서 파생되는 문제이다. 돌다리를 3분의 2 정도 만들었는데 자꾸 다리 길이가 길어지는 거다. 여기서 다시 1번의 나는 제작자가 아닌 커뮤니케이션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상기했어야 했다. 다리를 완성시키기 위해서 노력하는 건 당연하고 지금 어디쯤 왔는지, 우리가 어디까지 가야 하는지 돈 낸 사람한테 한번 확인했어야 하는 거다. 일단 작업자들을 어르고 달래서 이거 지금 일단 만들자. 하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나는 제작자와 함께 다리를 만들겠다고 내려갈게 아니라 이거 어디까지 만들어야 하는 거냐를 물어봤어야 하는 거다. 결국엔 내가 저 다리 주인이 생각하는 것과 만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동일한지 우리가 생각하는 다리의 모양이 일치하는 것인지를 집요하게 확인했어야 하는 거다.
적어놓고 보니 나름 AE 5년 차 사람이 이걸 이제 와서 깨달은 것도, 좀 그렇다. 창피하다. 사실 안 한 건 아니다. 다 놓치지 않고 결국엔 해냈기 때문에 프로젝트는 성공적으로 끝낸 거다. 하지만 부족했기 때문에 스트레스는 내가 받았던 것이다. 그걸 구분해야 한다. 일을 못한 게 아니라 스트레스를 받게 되는 구조를 만들었던 것. 내가 마땅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100% 못해냈기 때문에 끌려다니고 스트레스를 받았던 거다. 결론적으로 프로젝트는 잘 됐지만 나는 파송송 계란탁이 되어 버린 거지.
사실 내 탓만 하고 있기에는 억울한 부분도 많다. 1) 홍보에 대해서 1도 모르는 담당자 2) 줄어든 예산 3) 당겨진 일정 이 상태에서 내가 도대체 여기서 뭘 얼마나 더 잘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아니, 그런 상황에 이 정도 해냈으면 진짜 잘한 거 아니야? 결국엔 고객사의 신뢰를 확보했고, 덕션에는 예산 증액을 가져다주었으며, 우리도 기획료를 더 받아냈다. (이것도 순탄치는 않았지만 ㅜ)
누군가 그럼 이번 프로젝트로 느낀 것 중 다 잊어도 꼭 하나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무엇이냐 묻는 다면, 다시 한번 “나는 제작자가 아니라 ‘커뮤니케이션’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라 답하겠다. 어디서 그런 얘기를 들었다.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는 그걸로 돈을 버느냐 마느냐에 있다고. 나는 커뮤니케이션으로 돈을 버는 사람이다. 나는 제작으로 돈을 버는 사람이 아니다. 이 마인드를 다시금 아로새기게 됐다. 하지만 당연히 제작자의 편에 서야 하는 사람도 맞다. 제작자와 등을 지는 순간 결국 그게 커뮤니케이션을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리는 상황들을 왕왕 봤고, 그런 AE가 되고 싶지 않다.
기억은 미화되고 시간이 많이 지나면 이렇게 긴 나의 감상도 “개고생 했지만 나름 잘했던 프로젝트” 정도 딱 단 한 줄로 남을 것이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언젠가 또 비슷한 상황에 놓였을 때 그때 다시 와서 이 글을 읽어보자. 너는 커뮤니케이션으로 돈을 버는 사람이라는 것을 잊고 있는 것 같을 때 말이다.
브런치 작가 신청을 하기 전, 악몽까지 가져다준 큰 프로젝트를 끝낸 2021년 8월의 내가 쓴 울분의 회고록을 발견했다.
저장 글 저기 저 편에 숨어있던 글이 마치 나에게 너 이런 생각하는 사람이었어, 보여주듯 뿅 하고 나타났다.
다음에는 이렇게 하고 싶지 않아서 글을 남긴다는 4년 전의 나. 참 당돌하구먼..
글만 읽었을 때 나름 직업적,직무적 이해도가 높고 본인의 일에 자신감 혹은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 쓴 글 같다는 느낌이 든다. 나는 잘해왔는데, 5년 차나 돼서 왜 이렇게 했지? 담부턴 이러지 말아야지 하는 사람의 글
근데, 왜 나는 지금 이게 안될까. 난 더 나이가 들었고, 성장했고, 그 시간 동안 더 많은 경험을 했을 텐데.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것들도 있다지만 말이야.
이 글을 쓴 것도 나고, 지금도 나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