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가장 주목받는 스타 설현 양과 일반 회사원이 운명처럼 사랑에 빠질 확률은 얼마나 될까? 핸드폰 버튼 하나 누르면, 슈퍼스타와도 SNS 친구를 맺을 수 있는 요즘. 어디 세상에서 절대 안 되는 것이 있겠냐 만은, 어울릴 것 같지 않던 일반인과 슈퍼스타의 사랑은 여전히 어려워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상상만 해도 주체할 수 없이 좋은 이런 상황을 다룬 영화가 있다. 바로, 휴 그랜트와 줄리아 로버츠가 주연한 노팅힐(1999년작). 런던에 위치한 작은 동네 노팅힐에서 서점을 운영하는 남자 주인공과 은막의 슈퍼스타인 여자 주인공이 우연히 만나서 사랑에 빠진다. 우연에서 시작한 이 둘의 사랑을 운명처럼 만들어 주는 것이 있다면 바로 샤갈의 작품이다.
색채의 마술사라고 불려진 화가 마르크 샤갈. 그의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슈퍼스타와 일반인의 사랑이 아니라, 외계인과의 사랑도 불가능하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왜냐면 그의 작품 속에서는 연인들은 하늘을 나르고, 보라 빛 염소는 바이올린을 켜는, 마치 꿈속을 거니는 것 같은 황홀한 풍경들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유럽을 뒤덮은 세계 대전이라는 커다란 격랑 속에서, 공산주의를 피해서, 또 유태인 박해를 피해 떠돌던 샤갈의 삶은 분명히 녹녹하진 않았을 테지만, 그가 온화한 색채로 세상의 모든 시름을 덮어버리고 희망과 사랑을 전할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이었을까?
정답은 바로, 샤갈 곁에는 벨라 로젠 벨트라는 사랑하는 연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멜로드라마의 주인공처럼, 샤갈의 여자 친구의 친구였던 벨라를 만나 불 같은 사랑에 빠진 샤갈. 그는 벨라를 처음 만났을 때를 훗날 이렇게 표현했다. “그녀의 창백한 얼굴과 눈, 그녀의 검은 눈은 얼마나 크고 둥근지! 그것은 바로 나의 눈, 나의 영혼이었다. 나는 벨라야 말로 내 운명의 여인이며 아내가 될 사람임을 알았다.” 불 같이 시작된 이 운명과도 같은 사랑은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힌다. 빈민층으로 거리에서 거칠게 살았던 샤갈 과부 유한 집안에서 문학과 역사 그리고 철학, 당시 유행하던 문사철(文史哲)을 모두 공부했던 벨라의 사랑은 지금 생각해보면, 유럽판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혹은 태양의 후예 속 서상사와 윤중위의 유럽 버전이 아닐까 싶다.
이 드라마틱한 사랑은 벨라가 먼저 세상을 떠날 때까지, 35년간 서로만을 바라보는 지고지순한 사랑으로 계속 이어졌다. (벨라의 사후에 샤갈은 또 다른 여성들을 만나지만, 벨라만큼 사랑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샤갈은 자서전에서 벨라와 함께 지낸 시간을 자기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라고 회고했다. 말 그대로, 화양연화(花樣年華)였던 시절. 그래서 이 시절 그의 그림들은 모두 행복을 담고 있다.
일평생 노트에 수학 공식만 끄적거렸던, 그림에 문외한 단순 무식한, 공대 출신인 필자가 봐도 보기에도 너무나 행복한 작품들이다. 샤갈의 그림 속에는 맑은 눈의 염소와 초록색 사람은 깊은 교감을 나누며 행복한 모습을 보여준다. 또, 그의 그림 속에는 건강한 노동이 있고, 열매를 맺는 예쁜 나 무도 있다. 게다가 그림 속 세상은 어찌 그리도 다양하고 아름다운 빛으로 만들어졌는지, 그래서 샤갈을 색의 천재라고 불리는 것 같다. 세상의 모든 것에 감응하고 대답할 수 있는 시절과 그런 시절의 행복. 그래서 그의 그림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행복해진다는 말이다. 그래서, 힘든 일이 있을 때면, 내 삶이 샤갈의 그림 속 풍경과 같았으면 하는 상상을 한다. 한주의 업무로 피로에 지친 금요일, 오늘 하루는 샤갈의 그림을 보면서 시작하는 것을 추천해본다. 바로 이런 것이 우리가 고전을 접해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샤갈 나와 마을 (1911)
샤갈 생일날 (1915)
Marc Chagall, le mariee (1950)
“Happiness isn't happiness without a violin-playing goat.”
다시 노팅힐로 돌아와서, 남녀 주인공은 샤갈이 행복한 시절에 그린 그림 속에서는 늘, 염소가 있음을 알고, “Happiness isn'thappiness without a violin-playing goat.”라는 명대사를 남겼다. 두 사람이 썸을 타기 위한 시그널이었다. 만약에 샤갈을 좋아하는 슈퍼스타를 만났을 때, 우리는 한국 식으로 시인 김춘수의 시(詩)를 이야기해보는 것은 어떨까? 시인 김춘수가 샤갈의 작품에 영감을 받아 쓴 시(詩)에 대해서 이야기하다 보면, 노팅힐에서 줄리아 로버츠를 만나는 인연이 연남동 또는 혜화동에서 설현 씨 혹은 송중기 씨를 만나는 인연으로 변신할지도 모르겠다.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김춘수
샤갈의 마을에는 3월에 눈이 온다.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靜脈)이
바르르 떤다.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을 어루만지며
눈은 수천 수만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3월에 눈이 오면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한 겨울 열매들은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들은
그 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打令調·其他』, 19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