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되고 싶습니다#21
난 낯을 많이 가리진 않는다. 사회생활을 몇 년 하고 난 후엔 낯을 더 가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매우 사교성 있고 살가운 사람이냐면 그렇진 않다. 처음 만나면 수줍어도 하고 거리도 두는 그냥 그런 사람이다. 다만 사람 만나는 것을 어려워하지 않을 뿐이다. 여행에서 초면인 사람들과 수다를 떠는 것을 좋아하고, 일로 그때그때 만나는 사람이나, 이해관계로 만나는 낯선 모임도 크게 어려워 하진 않는다. 스스로 내향성 70%에 외향성 30%의 인간이라 생각한다. 내향성이 더 많은 건, 혼자 있을 때 에너지가 더 생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나는 낯을 많이 가린다. 꽤 많이 가린다. 오다가다 만나는 상황엔 낯을 많이 가리진 않지만, 깊게 만나야 할 상황에는 낯을 가린다. 오래 만나야 되는 사이가 될 것 같으면, 낯을 가리기 시작한다. 자주 만나면서 서로 겪게 될 감정의 오지랖을 어려워한다. 타인이 나에게 하는 오지랖도 싫지만, 나 또한 타인에게 오지랖을 부리지 않을까 조심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낯을 가린다.
다른 글에도 이야기하였듯이 나는 꽤 예민하다. 무서운 영화, 슬픈 영화는커녕, 로맨스 드라마도 보기 어려워한다. 예전 '커피프린스'라는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를 너무나 재밌게 몰아보곤, 한 달 넘게 지나친 허무감에 시달린 적도 있었다. 어릴 땐 이런 감정의 예민함에 의문이 들곤 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안 그런가? 나만 그런가. 궁금했다. 서서히 사회와 접하게 되는 나에게는 어려운 문제였다. 이것이 남들과 다른, 나의 '문제' 같았다. 고쳐야 하는 문제 같았다.
감정의 예민함을 지금은 천성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어릴 땐 그 예민함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예민함은 나쁜 것 같았고 왠지 '털털한 척이 옳다(?)'고 생각되었다. 그래야만 친구들과 오래 만나고, 그들이 나를 싫어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어쩔 땐 예민하게 구는 아이들이 부러울 때도 있었다.
털털한 척 해도 예민함을 모두 숨길 수는 없었다. 상처되는 말을 들을 때 의연하게 넘기려 하였지만 모두 넘길 수는 없었다. '욱'이 튀어나오곤 하였다. 그럴 때면 사람들은 쿨하지 못하다 하였다. '욱'의 발생은 나의 예민함을 다시 한번 건드렸고 스스로도 내가 쿨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욱'이 많은 관계일수록 낯을 더 많이 가리게 되었다. 그럴수록 쿨한척하는 가짜 기술만 더 많이 늘어나게 되었다.
'소심함, 쿨하지 못함'은 '대인배, 군자의 반대 개념인 소인배'로 취급받곤 한다. 네이버 어학사전을 검색해 보니 '소인배'란 '마음 씀씀이가 좁고 간사한 사람들이나 그 무리'란다. 일단 '간사함'은 내 이야기와 관련이 없어 보인다. 소인배라는 단어, 생각보다 무서운 단어다. 이 의미는 넘어가자. 다음 의미인 '마음 씀씀이가 좁다'라는 말을 분석해 보았다.
마음 씀씀이가 좁다라는 말은 아량이나 배려가 부족하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예민함과는 별개로 사람에 대한 관심과 사랑의 부족이라고 생각한다. 타인이 주는 상처에 별거 아닌 듯 넘어가는 것을 마음 씀씀이가 넓다고 해석할 순 없다. 그것은 괴로운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타인을 사랑하는 것처럼 나를 사랑한다면 나에게 상처되는 말은 괴로울 수밖에 없다.
표현하는 성격이 아니어서 무시 할 수 도 있고, 나처럼 무식하게 욱할 수도 있고, 의연히 타인에게 사과를 요구할 수 도 있다. 방법이야 어떻든, 괴로워하는 마음이 '나'라는 사람을 위한 마음 씀씀이라면, 이 괴로움은 소심함, 소인배가 아닌 오히려 나라는 사람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배려심, 즉 나를 사랑하는 대인배가 아닐까 달리 생각해 보았다. 터부시 할 일이 전혀 아니었다. 이것 또한, 다른 의미의 쿨함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난 쿨하지 못함을 쿨하게 이야기하고 싶다. 내 감정의 예민함이, 관대함의 부족이 아닌 감수성의 풍부함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그리고 그 예민함을 고맙게 여기고 싶다. '욱'이라는 원시적(?)인 방식으로 모양은 빠졌지만, 나의 마음을 지켜주었던 그 배려심은 고맙게 여기고 싶다. 앞으로 욱할 일이 생긴다면 타인과 나, 모두 감정 소모가 있는 핫한 '욱'보다, 타인에게 내 의견을 차분히 전달하는 쿨한 '욱'을 하고 싶을 뿐이다.
자신의 마음도 헤아리지 못하는 사람이 타인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까.
왜 학교와 회사에서 '감정과 감수성'을 터부시 했던 것일까.
왜 '마음을 헤아리는 감수성'이 불편했던 것일까.
왜 이 모든 불편한 것들을 '당연히' 여기곤 하였을까.
의문이 많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