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

영화 영주 리뷰

by 아네요


스포일러 있습니다.






포스터만 봐도 슬퍼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검색하여 줄거리를 보니,

나쁘고 좋은 사람들을 만났다.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고 졸지에 가장이 된 영주는 자신의 학업은 포기하더라도 동생 ‘영인’이 만큼은 책임지려 한다. 하지만 영인은 어긋나기만 하고, 현실은 냉혹하기만 하다. 동생 ‘영인’의 사고로 하나밖에 없는 집까지 팔아야 할 상황에 내 몰린 ‘영주’는 부모를 죽게 만든 그들을 찾아간다.’


줄거리만 봐도 숨이 막혔다. 게다가 위의 ‘나쁘고 좋은 사람들을 만났다’는 문장에 거부감을 느끼고 말았다. 슬픈 영화도 잘 못 보지만, 힐링이라며 억지 해피엔딩을 만드는 이야기도 잘 못 보기 때문이다. 허무했다. 그렇다고 새드엔딩을 좋아하냐면 그건 더 싫어한다. 이 영화처럼 아이러니하다. 아이러니 하다는 말은 이 영화도 해피엔딩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영화의 시작은 생각하였던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상황은 먹먹하였고, 해결방법은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사고를 친 동생의 합의금, ‘삼백만 원’이 심청이의 ‘삼백석’처럼 느껴졌다.





처음엔 복수심이었단다.

돈 구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자, 영주는 교통사고를 낸(부모를 죽게 만든) 가해자를 찾아간다. 마치 심청이가 인당수를 찾아가듯 영주는 그들을 찾아간다. 복수심이라 하여도 어떤 행동을 설계하고 그들을 찾아간 것 같진 않았다. 영주는 이제 19살의 어린 어른이었다. 영주는 가해자의 작은 두부가게에 취직하게 되고, 합의금을 더 이상 미루기 힘들게 되자 그 가게에서 돈을 훔치게 된다.

하필 돈을 훔치는 와중에 가해자에게 들킨다. 하지만 자책감에 몸이 망가져 술에 잔뜩 취한 가해자는 쓰러지고 영주는 겁에 질려 그냥 도망을 칠만도 하지만, 결국 119에 신고한다.

죽을 뻔한 가해자를 구한 ‘영주’에게 가해자의 부인은 매우 고마워한다. 영주가 돈을 훔치려다 남편을 구한 것을 알지만, 돈이 궁했을 뿐 나쁜 사람은 아니라며 영주를 좋아해 준다. 더 필요한 돈이 없냐며 영주에게 돈을 더 보태 주기까지 한다.





부모를 죽인 사람의 '연민과 동정'이지만 영주에겐, 오랜만에 받아본 사랑이었던 것일까. 5년 전 부모가 죽고, 관심 한 번 못 가져 본 영주에게 이들의 관심은 특별해 보였다. 그동안 미뤄왔던 부모의 관심을 한 번에 받는 기분이었을까. 그들의 따뜻한 연민과 동정심에, 영주는 자신도 모르게 이 비극적인 공간에 마음을 줘버린다. 그리고 그때 사고로 식물인간이 되어버린 가해자의 아들을 보며 영주 또한 그들을 동정하게 된다.





‘연민, 동정’을 타인의 불행에서 기인한 사랑이라는 글을 읽었다. 사람 사는데, 필요한 사랑이긴 하지만, 그것만으로 계속 사랑하긴 힘들다. 불행이 사라지면 끝나는 사랑이기에, 이 사랑은 인간애로 발전하지 않으면 사그라지고 만단다.

영주가 ‘남편이 죽인 사람들의 자식’이라는 말에 가해자의 아내는 무너지고 만다. 연민의 상대였던 영주가, 자신의 불행을 되뇌게 하는 존재라는 것을 안 그녀는 더 이상 영주에게 사랑을 보낼 수 없었을 것이다. 이때 영주가 얼마나 사랑이 고팠는지 보였다. 영주 또한 그들을 보며 그때의 불행이 떠올라 끔찍했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관심에 목을 매는 것을 보며, 잔혹하게 슬펐다.





비극적인 영화를 보면 사람들은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공포와 연민으로 주인공에 감정이입하다 보면 결국 정서적 해방(배설?)을 한다는데, 나는 그게 쉽지 않다. 공감하지 못한 슬픈 영화는 강요로 다가왔고, 배설은커녕 공포와 연민으로 벌벌 떨기 바빴다. 그런 영화에도 눈물은 났지만 울고 나면 억울했다. 물론 아닌 영화들도 있었지만, 많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슬픈 영화를 보기를 주저하곤 하였다. 영화 ‘영주’도 그랬다. 보겠다고 신청은 하였는데, 두려웠다. 시작부터 고구마를 먹고 시작하는 설정에 숨이 턱 막혔다. 그래서 보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이토록 보기 힘들었던 ‘영주’에서 나는 생각지도 못한 해방감을 느꼈다.


마지막 장면, 영주가 다시 일어나 ‘그냥 어느 하루처럼’ 씁쓸히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떨림을 느꼈다. 다시 일어나 걷는다는 것을 '상처받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는' 그런 캔디 같은 행동으로 보지는 않았다. '해야만 하는 씩씩함'은, 싫다.

그녀의 뒷모습에서 본 것은 ‘슬픔, 그 다음에 만나는 슬픔’의 모습이었다. 마치 한 번도 보지 못한 내 뒷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이는 억지로 만든 해피엔딩보다 나를 더 위로해 주었다.





삶은 영화처럼 울부짖으며 끝나지 않는다. 끝이란게 없다. 영화처럼 극적인 위로도 극적인 울음도 없다. 울고 난 다음에 눈물을 닦고 걸어가거나 잠이 들거나 밥을 먹어야 했다. 나는 이때가 더 슬펐지만, 더 이상 울 수 없었다. 그건 ‘민폐’였다. 현실의 슬픔은 영화의 슬픔처럼 ‘파란만장’ 하지 않았다.


영주에서 보여준 마지막 뒷모습에서 지난한 슬픔을 보았고 그에 공감이 되어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김향기 매니저의 이름까지 다 나오는 엔딩 크레디트를 모두 보고 나왔다. 이게 사람들이 말하는 카타르시스일까. 그동안 브런치 무비 패스에서 추천해준 영화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영화였다. 내가 싫어하는 슬픈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좋았다. 괜히, 감독에게 고마웠다. 사람들을 이렇다 저렇다 함부로 재단하지 않는 따뜻한 시선을 가진 사람같이 느껴졌다.



* 참고로 영주 남동생 ‘영인’으로 나온 연기자가 마음에 들었다. 오히려 왜곡된 삶을 살고 있는 영주에 비해, 토해내며 살고 있는 영인의 삶이 더 현실에 뿌리 내린 것 같았다. 영주를 연기한 ‘김향기’의 연기도 대단했지만, 영인의 연기가 인상 깊었다. 한대 쥐어박고 싶을 만큼 리얼했다. 처음 보는 연기자여서 그랬을까. 그 연기자는 그냥 ‘영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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