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갈 수 없는 <다가오는 것들>

영화 '다가오는 것들' 리뷰

by 아네요


다가오는 것들(Things to come, 2016) 스포일러 있습니다






이야기가 있고 좌절과 희망이 가득한 빨갛고 노란 삶이 아니었다. 색깔 없이, 아무 맛없이, 하루하루가 무료하게 다가오던 어떤 날, 불안함과 모멸감으로 하루가 지겨웠던 어느 날, 이 영화를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는 삶’이란 무엇일까 생각하게 되었다. 영화 ‘다가오는 것들’은 그런 삶에 대한 이야기였다.




“왜 그걸 말하는 거야? 묻어두고 살 순 없었어?”


주인공 나탈리는 파리에서 고등학생들에게 철학을 가르치는 선생님이다. 근처에 사는 홀어머니와 독립한 자식 둘, 나탈리처럼 철학을 가르치는 남편이 있다. 어느 정도 지위와 지식을 가지고 사회에서 자신의 존엄을 세울 만큼, 갖춰야 할 것들(?)을 적당히 가졌다. 그렇게 ‘가지고’ 있는 그녀에게 가질 수 없는 것들이 다가온다.

먼저 남편이 외도를 고백한다. 단순히 고백만이 아닌 다른 여자와 살기를 원한다. 아침드라마의 불륜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둘 모두 철학 공부를 하는 사람이라는 자부심 때문일까, 물고 뜯고 싸우는 아침드라마 이혼의 모습이 아니다. 오래된 연인이 이별하는 모습 같다. 사랑의 끝을 아쉬워하기보단 그동안 공유했던 추억과 공간(별장), 물건(책)들의 상실이 더 아쉬운 그런 관계. 남편의 고백에 나탈리는 묻어두고 살 순 없었냐고 되묻는다. 그녀도 모르진 않았던 것 같다.



그녀에게도 잘생기고 생각이 통하는 젊은 제자가 있다. 영화 포스터만 보면 마치 이 젊은 남자와 로맨스 영화인듯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것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 심지어 제자를 만난 후 혼자 보러 간 영화관에서(중년의 로맨스를 그린 ‘사랑을 카피하다’라는 영화였다) 로맨스가 펼쳐지긴커녕 집적대는 변태만 만날 뿐이다.

로맨스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나이로 인한 ‘로맨스의 상실’을 중년 여성들이 어떤 상황과 느낌으로 받아들이는지, 나탈리를 통해 솔직하게 드러내고 싶었던 것 같다. 그것은 아래 파비엥과 나누던 나탈리의 대사에서 명확히 나타난다.


"중요한 소식이 있어. 남편하고 별거 중이야. 이혼할 거야. 25년을 함께했는데 새 애인을 만났대. 괜찮아, 잘 받아들이고 있어. 여자는 40살 넘으면 쓸모없어져. 그게 진실인걸. 내 나이에 여자가 바람난 거 봤어? (중략) 별일 아니야 삶이 끝난 것도 아니고. 실은 나도 각오하고 있었어. 동정할 필요 없어. 지적으로 충만하게 살잖아. 그거면 족히 행복해(참고로 남편이 만난 여자는 자신 또래의 나이든 여자다. 버스에서 스치듯 상대를 보고 난후 나탈리가 웃는 모습은 자신의 편견에 대한 어이없음 같았다) "





엄마의 죽음도 다가온다. 정신적 불안으로 병적 증상이 있는 엄마는 시도 때도 없이 딸 나탈리를 찾는다. 잦은 자해 시도에 소방관이 시설에 입원시키라는 말을 건 낼 정도이다. 끔찍하게 시설을 싫어하는 엄마의 의지 때문에 입원을 미루 왔는데, 남편의 외도를 겪은 후 엄마를 시설에 입원시킨다. 병원에서도 불안증세와 치매로 헤매던 엄마는 어느 날 죽는다.

그리고 자신의 자존심이었던 철학서적도 더 이상 출판을 할 수 없게 된다. 시류에 따라 제자의 책은 살아남았지만 나탈리의 책은, 그녀처럼 퇴물 취급을 받게 된다.


다가오는 것들은 하나같이 다가갈 수 없는 것들이다. 늙음, 자식의 성장, 사랑의 끝, 부모의 죽음, 시대의 변화 등등. 상실감도 같이 주는 것들이어서 다가가긴커녕 최대한 미뤄두고 싶은 것들뿐이다. 어느 하나 내 의지로 할 수 없는 것들,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들뿐이다. 남편에게 건넨 ‘묻어두고 살 순 없었어?’라는 말처럼 묻어둘 순 없는 것들. 이 모든 것들은 자신이 어찌할 수 없이 흘러온다.



이런 삶의 모습들은 묘하게 ‘타자’와 닮았다. 영화의 시작 부분 나탈리가 쓰고 있던 ‘다른 사람의 삶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이 가능한가?’는 영화의 주제와 통하는 부분이 있다. 처음엔 위의 문장이 남편의 외도를 가리키는 복선 정도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할 수 록 저 문장은 영화 전체를 흔들고 있다.

대학만 붙으면 취직만 하면 가게만 차리면 뭔가 삶의 주도권을 내가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였지만 삶은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다. 타자 또한 마찬가지이다. 절대 변할 것 같지 않던 성애적 사랑도 식기 마련이고, 끈끈하던 우정도 공유하던 생각이 달라지면 낯설게 된다. 자식은 자라서 독립을 하고, 변치 않는 부모의 사랑도 죽음 앞에선 어쩔 수 없다. 내 손 밖에서 움직이는 삶처럼 타자 또한 그렇다.





영화는 짧게 짧게 빠르게 흘러간다. 쉴 새 없이 움직이는 나탈리를 쫓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 사건이 생기더라도 멈추지 않고 흘러가는 삶처럼, 화면은 쉬지 않고 나탈리의 행동을 쫓는다. 부모의 죽음에 장례식을 하는 나탈리 모습에서 영화 속 감정이 아닌 현실 속 감정이 느껴졌다. 그리고 쉬지 않고 움직이는 그녀 모습은 가만히 감정과 마주하면 상실감과 모멸감이 몰려올까 두려워하는 사람처럼도 보였다. (누군가는 감정에 휩쓸리지 않는 그녀의 모습이 꿋꿋하다며 부러워하였는데) 나는 그녀의 그런 모습이 슬퍼 보였다. 우는 모습보다 더 슬픈 ‘슬프지 않다’하는 모습. 그녀의 지적 충만함(?)이 함부로 눈물을 흘릴 수 없게 만드는 듯 하였다. 엄마의 장례식 때 읽었던 나탈리의 문구에서 그녀의 지난한 슬픔이 보였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보이는 건 암흑뿐이다.

자연은 내게 회의와 불안의 씨만 제공한다.

내가 놓여있는 상태에서 내가 뭔지, 뭘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나는

나의 신분도 의무도 모른다.

내 마음은 진정한 선을

그것을 다르기를 온전히 바란다.

영원을 위해서라면 어떤 것도 비싸지 않다.”

- 파스칼의 팡세




애들은 품을 떠났고, 남편은 가고, 엄마는 죽고. 온전한 자유를 되찾은 거라며 의연해하는 그녀는 제자 파비엥을 찾아간다. 그로 인해 나탈리의 초라한 현재 모습이 더욱 극명히 보여진다.

파비엥은 자신의 신념이 명확한 사람으로 그 또한 철학가다. 예전 나탈리와 함께 아도르노 책을 썼던 제자이다. 젊고 급진적 생각을 가진 사람으로 어느 숲에서 사상이 같은 사람들과 함께 머물며 히피적 삶을 사는 사람이다. 자신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 힘쓰는 사람이다. 예전 나탈리가 그러했듯이.

그런 명확한 신념에 살아가는 파비엥에게 나탈리는 예전같이 공감할 수 있는 인물이 못된다. 그녀의 삶이 그녀가 말하는 생각처럼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이런 생각을 나탈리에게 건네게 되는데, 그동안 한 번도 쓰러져 울지 않던 나탈리는 방으로 돌아와 엄마의 고양이 ‘판도라’를 꼭 껴안고 서럽게 운다.

자신의 신념과 생활마저 존중받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지만, 그녀는 빠르게 흐르는 영화처럼 또 열심히 움직인다. 살아가는 것이다. 이번엔 색다른 것이 다가온다. 그녀에게 상실감만 안겨주는 기존의 다가오는 것들과 다른, 무언가가 다가온다. 손녀가 태어난 것이다. 자식을 낳은 딸의 모습과 손녀, 나탈리의 모습은 그 어떤 철학적 지식의 충만함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무엇을 보여준다. 그녀는 서서히 다가오는 것들의 흐름을 맡긴 채 삶을 살아가기 시작한다. 이때 수업장면이 잠깐 나오는데 수업 중 아래 글이 나온다.


“우리는 행복을 기대한다

만일 행복이 안 온다면 희망은 지속되고

이 상태는 자체로서 충족되며

그 근심에서 나온 일종의 쾌락은

현실을 보완하고 더 낫게 만들기도 한다.


원할 게 없는 자에게 화 있으라,

그는 자기 것을 모두 잃는다.


원하던 것을 얻고 나면 덜 기쁜 법

행복해지기 전까지만 행복할 뿐”


- 알랭의 행복론



나탈리는 한 번 더 파비앵의 숙소를 방문한다. 마지막 짐인 고양이 ‘판도라’를 파비앵에게 주기 위해서다(요 고양와 관련된 이야기도 재밌다. 이 영화는 별거 없는 스토리 같지만 소소하게 숨어있는 의미들이 많다). 잠이 오지 않아 거실로 내려온 나탈리는 거실에서 혼자 일하는 파비앵을 만나고, 낮에 잠깐 피운 마리화나 덕에 어지럽다며 소파 위에 쓰러진다. 요염하게 누운 나탈리의 모습을 보며 ‘뭐야 결국 로맨스인 거야’하며 불안에 떨고 있는(?) 나를 농락하듯, 별일 없이 다음날 아침을 맞는다(이 영화 코믹 요소가 분명 있다. 나만 그런가?).

여기서 중요한 것이 파비앵의 표정이었다. 다음날 나탈리를 배웅하는 장면 다음에, 내내 나탈리를 쫓던 앵글은 파비앵을 쫓는다. 차를 타고 숙소로 돌아오는 파비앵의 모습을 클로즈업한다. 아이가 생긴 파비앵의 얼굴은 전과 같이 확신에 찬 청년의 모습이 더 이상 아니다. 고민하며 난감해하는 그의 모습에서 (나탈리에게 그런 말을 했던 것의)후회가 느껴지는 것 같다. 뭐 그게 아니라면 , 파비앵 또한 다가오는 것들을 느끼기 시작한 것일까? 그의 표정을 보며 누구의 삶도 함부로 옳다 그르다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의 삶도 아빠의 삶도 그리고 나의 삶도.




이 영화가 위로가 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보았다고 불안함과 모멸감이 사라지고 평온해졌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함을 알았을 뿐이다. 이는 머리로 아는 지식일 뿐이다. 온전히 오롯이 살아가려면 나탈리처럼 순간을 살아내야 한다는 것을 영화를 보며 느꼈다. 이는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고 가르친다고 배울 수도 없는, 다가오는 것들이란 것을.

겉으로 보기엔 초라해 보일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아가는 삶’이 얼마나 용기 있고 의연한 삶인지 이 영화를 통해 다시금 확신하게 되었다. 그 확신에서 나를 세울 수 있고 타인을 존중할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있기를 스스로 간절히 바랄 뿐이다.




ps. 철학을 몰라도 영화를 보는 것에 큰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난 후 이런저런 검색을 하면서, 철학자들을 알게 되었을 때 더욱 재밌을 수 있는 부분들이 많음을 알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거론한, 타인에게 지적을 잘하지만 자신은 외도에 빠진 남편이 찾는 책이 쇼펜하우어란 점도 재밌었고, 평생을 단순한 혁명이 아니라 진정한 변혁을 이룩할 수 있는 이론과 실천의 조화를 찾은 아도르노가 강의 도중 급진 단원들에게 ‘아도르노는 죽었다’며 비난을 받게 되자 넉 달 후 심근경색으로 죽었다는 이야기는 나탈리를 떠오르게 하였다. 그리고 타자와의 존재론을 펼친 레비나스의 현상학에 대한 몇몇 글에서 영화 곳곳에 흐르고 있는 생각들과 많은 것이(출산이나 타자의 의미나) 일치하는 것을 느꼈다.

실제 감독의 부모 또한 모두 철학 선생이라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래서 이런 생소한(나에겐) 철학자들이 별일 아닌 것처럼(?) 자연스레 자리잡고 있었나 보다. 기껏해야 검색으로 찾아낸 철학자에 관한 짧은 이야기들 뿐이지만, 그들을 더 알고 싶게 하는 욕구는 영화를 보고 크게 일어났다. 그런 면에서도 이 영화가 참 고마웠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아저씨도 나를 이용할 겁니까, <증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