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비밀정원으로
아이들은 그 애와 같이 있는 것을 좋아했다. 그 애와 같이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말이 많은 아이가 아니라, 말하기를 좋아하는 친구였다. 영화이야기를 하면 마치 영화를 보는 것처럼 이야기를 하였다. 어떤 때는 영화보다 더 사실적으로 제스처를 넣어가면서 이야기하면 아이들은 이야기에 흠뻑 빠져들었다. 영화이야기뿐만 아니라, 영화관에서 있은 이야기도 해 주었다. 영화관이 갑자기 정전이 되는 바람에 컴컴한 영화관에서 있었던 컴컴한 이야기들, 2층에서 휴지를 아래로 던지고, 누구는 야유를 하고, 누구는 술에 취했는지 노래를 불렀다고 했다.
그래, 그때는 그랬지. 볼거리, 들을 거리가 귀한 시절, 유일한 낙이 영화 보고, 만화가게에서 만화 보는 것이었다. 친구가 만화를 집에 빌려오는 날이면 아이들이 모두 그 애 집으로 모였다. 만화는 세트로 여러권이었다. 아이들은 미치 보물을 본 것처럼 환호성을 질렀다. 1권을 보면서 20권을 쳐다보니 오늘 실컷 보겠다는 생각에 입이 귀에 걸렸다. 자세도 모두 제 각각. 방바닥에 드러누워서 보는 친구, 벽에 등을 기대고 보는 친구도 있고, 방바닥에 엎드려서 배를 깔고 보는 친구. 모두 편하게 봤다. 선생님이 내 준 숙제도 하지 않았다.
오늘 모처럼 7080 노래를 틀었다. 아이들 얼굴이 떠 올랐다. 그런데 모두 흑백이다. 분명히 컬러였는데, 내 눈에 보이는 잔상은 흑백이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마찬가지였다. 떠오른 태양도 붉게 보이지 않았다. 이글거리는 모습만 보였지. 붉은색은 없었다. 검은색은 더 선명하게 검었고, 흰색은 더 하랬다.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기억들도 없었다. 남아 있는 게 몇 개 안 되었다. 생각나는 단어조차 없었고, 바싹 마른 도로 위로 버스가 지나가자 먼지가 한바탕 일었다.
잘 있겠지. 그게 친구를 생각하는 유일한 말이었다. 밀양 강변 강가에서 삼각 텐트를 치고 놀던 때. 버너로 불을 때고, 라면을 끓이고, 밥을 하고, 기타를 치면서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놀았다. 그때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세상이야기도 하지 않았고, 어떻게 먹고살지 그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냥 친구들 이야기만 했을 것 같다. 잘하지는 이야기, 잘 지내자는 이야기, 우리 우정 변치 말자는 그런 이야기들. 참 세월이 많이 흘렀다. 아이들 웃은 모습이 눈에 짠하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