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담하게 적어보는 해고 일지
대기업 임원의 경우, 별도 사무공간을 내어주거나 일반 임직원들과 같은 공간에 있더라도 파티션을 크게 쳐서 넓은 공간을 만들어준다. 그것이 임원의 복지 중 하나이다.
법인카드를 무한정 쓸 수 있고, 월급이 많고, 기사가 있고.. 복지야 말할것도 없이 화려한 수준이며, 나와는 관련 없는 부분이기에 여기까지 적는다.
임원과 접촉할 일은 많지 않다. 복도에서 마주치면 가볍게 목례를 하고 지나가거나, 어느날 갑자기 살갑게 대해주면 나도 살갑게 반응하는 정도이다. 1년에 한 번 같이 식사하자고 하면, 그 날 다른 약속들을 서둘러 취소하고 임원과의 식사일정을 우선한다.
첫 퇴직한 임원을 본 건 20대 초반의 일이었다.
회의하러 가셨다고 들었는데, 언제 돌아오셨는지 저 파티션 넘어로 짐을 옮기고 정리하는 소리가 들린다.
책들을 박스에 옮겨담는 둔탁한 소리, 박스테이프 뜯는 날카로운 소리, 무얼 놓쳤는지 쨍그랑 하는 쇳소리..
모든 임직원들은 이미 건너건너 상황을 알고, 그 누구도 입 밖으로 말 한마디 내뱉지 않는다.
모니터 화면만 초점없이 바라보는 임직원들 사이로 사무실 공기는 매우 무겁고 우중충했고 묵직했다.
약 1시간 후 짐 정리를 끝낸 상무님은 임직원들의 공간이 있는 곳으로 나왔다.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엘레베이터까지 바래다 주었다.
"잘 지내시구요. 수고 많으셨습니다."
누군가가 긴 침묵을 깨고 마지막 인사를 전한다.
회의 중 갑자기 인사팀으로부터 받은 전화 한 통,
'계약 만료가 되었으니, 오늘 당장 짐을 챙겨 떠나주면 되겠다'는 전화였다.
임원은 1년 단위의 계약직이고, 그 날은 정확히 1년이 도래한 그 날이었다.
30년간 일한 결과의 끝이 저런것일까, 보는 나도 안타까웠고 굴욕적이었다.
회의 중간에 계약만료 통보를 받고, 서둘러 짐을 정리하고 집으로 향하는 그 모습이 초라했다.
(몇 년 전부터는 한 달 전 통보로 나름의 자존심은 지켜주는듯하다.)
가족들에게 아직 얘기를 못했고, 어떻게 말을 꺼내야할지 모르겠다고 근심 가득한 얼굴로 말하는 그를 보았다. 불과 일주일 전만 해도 모두가 깍듯하게 모시던 이 층의 제왕같은 존재가 하루아침에 백수 신세로 전락하는걸 보게 되었다.
"임원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돈도 많이 벌었을거고.. 네 걱정이나 하렴"
누군가는 이렇게 말한다. 맞는 말이다.
그들은 퇴직 후 임원 커뮤니티에서 서로 꾸준히 연락을 하며 근황을 공유하고 사업적인 이야기를 나눈다고 한다.
최근 브런치에서 30년 근무하고 퇴직한 여성 임원의 에세이를 읽게 되었다.
잃어버린 건강, 보증 수표(신뢰성/소속감)를 잃고 세상 밖에서 맨 땅에 헤딩하며 다시 걸음마를 걷는 아이가 되어... 회사에 충성하여 다닌 결과에 다소 후회하고 실망하는 모습.
솔직히 안타까움이 가장 크다. 오랜기간 조직에 몸담아 왔던 나 또한 별반 다르지 않을거란 두려움이 몰려든다.
대기업에 다니면서, 나이가 들수록, 어째 불리한점이 더 많아지는 것 같다.
도전이 무섭고 두렵다. 회사라는 선택이, 매일 반복적인 루틴이, 내가 할 수 있는 인생의 최선인걸까.
과연 이 끝은 어떻게 끝날것인가.
회사라는 가면을 벗겨내고, 나의 진정한 가치와 자아발견을 찾는 연습이 필요하단걸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