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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림트리 Nov 14. 2023

대기업 10년차에 맞이한 번아웃

다른 부서로 이동을 요청하다

나를 오랜기간 괴롭힌 부서장의 성격은 나와 너무 달랐다.

그는 매우 급했고, 빠른 업무처리를 원했다. 

다른 분야에 오랜기간 몸담고 와서 그런지 내 업무들의 특성이 어떤지 파악을 못하고 있는듯했다.

나의 사무업무는 꼼꼼함과 정확함이 생명이다. 이는 물리적으로 양이 많아지는 상황에서, 빠른 처리가 절대적으로 어렵다.  

우선순위를 정해도 한계가 있었다. 

나는 한 사람인데 업무량이 1.5인분에서 2인분으로 그리고 2.5인분까지 늘어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최대한 힘든걸 티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나에게도 개인적인 목표가 있었다. 

이번년도 고과를 잘 받고 싶었고, 어쩌면 인정받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을지 모른다. 

말도 안되는 업무량이지만 해내고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 


그러나 부서장도 내게 원하는 기대치가 있었다. 

내가 그 선에 도달하지 못했던건, 한 길만 걸어온 부족함도 있었고, 

더 큰 숲을 보지 못하는 미숙함도 있었다. 

당장 눈앞에 닥친 업무가 많아서 큰 그림을 볼 수 조차 없었고,

그 이면에 선제적으로 파악해야 할 부분을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관리자로서의 역량을 이제부터 키워야할텐데, 일상생활까지 어려워질만큼 당장 처리해야 할 실무업무가 많으니 나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인력이 없으면 관리자로서의 역량을 키우기가 어렵다고, 줄기차게 인력을 요구하는 나를 보며,

그는 나의 역량과 능력의 문제가 더 크다고 결단을 내린듯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나는 네가 일이 그렇게 많은지도 모르겠어"


그는 나를 관리자에서 실무자로 내리고, 이 자리를 다른 사람으로 바꿀 채비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나의 관리업무를 더 경력이 높고 일 잘한다고 소문난 베테랑 직원으로 대체한다고 통보했고,

기존 실무를 도와주던 직원을 다른지점으로 보내며 그 자리를 나에게 넘겼다.

너무 속상했다. 나는 이제 관리자에서 실무자로 내려가야한다.

매번 실무업무를 지켜보며 소모적인 일이 많아 그 업무를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해왔었다.

그런데 내 의견은 묻지도 않고 본인 맘대로 이런 결단을 내리고 통보하는 부서장이 원망스러웠다. 


이 결정이 급박하게 이루어진 탓에 나는 이제 실무업무를 곧바로 익혀서 진행하는 실무자이자,

새롭게 온 경력많고 일 잘한다는 베테랑 직원에게 기존 나의 관리업무를 인수인계를 하고, 

중간에 들어오는 갖가지 프로젝트 업무를 함께 해야하는 삼중 멀티플레이어가 되어야했다.

난 한 인간으로써 모든걸 내려놓고 업무에 임해야했다. 

'난 일을 하기 위해 태어난 인간이다.. 모든걸 포기하자.'


그 와중 "화이팅"을 외치며 굳은 결의로 들어온 경력자 베테랑 직원 A도 점점 업무를 익히며 표정이 어두워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A는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며 눈물을 터뜨렸다. 

절대로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업무량이라며 정신적인 충격과 고통을 호소했다.  

그동안 내가 어떻게 감당하고 살아왔을지 상상이되지 않는다며 나의 아픔에 공감해주었다.


내부적인 상황의 심각성을 전혀 인지 못하고 있는 단 한 사람, 부서장은 점점 과격해졌다.

본인 뜻대로 풀리지 않는 모든 일의 원인이 모두 나로 인해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하는듯했다.

그는 인생의 히스테리를 끊임없이 내게 풀어내고 있었다. 

나의 능력치를 깔보며 굴욕주는 말을 서슴없이 행하는 부서장의 행동은, 공교롭게도 A에게도 영향을 크게 미치고 있었다. 내가 저지른 한 두개의 실수로 길길이 날뛰는 부서장의 말과 행동에 A는 크게 겁을 먹고 있었다.


지속된 가스라이팅에 회의감을 넘어 삶의 의미조차 느껴지 못하고 있던 찰나에, 난 정신이 번뜩 들었다.

부서장의 큰 그림이 보였다.

시간이 길게 걸릴테지만 나의 관리자 자리가 A직원에게 대체되면 , 그간 밤새워 일해온 내 노력은 보상도 없이 쥐도새도 모르게 감춰질 것이다. 지금 하는 업무도 나와 전혀 안맞는다. 이제 아쉬울게 없다. 

나의 노력, 시간, 에너지.. 저녁 삶을 포기하고 살아온 인생을 되돌아보며 큰 결단을 내리기로 했다. 

이 부서를 떠나 다른 부서로 도약하는것만이 답이었다. 최대한 빠르게 진행되어야한다. 

업무도 힘들고, 인정도 못받고, 저녁 삶도 없고, 너무 바빠서 점심도 (거의) 혼자먹고..

한 인간의 존엄성이 처절히 무너지고 있었다. 

  

이 부서를 떠나 다른 지점으로 옮기고 싶다고 강력하게 어필하며, 

아는 인맥을 최대한 동원해 도움을 요청하자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했다.

나의 소식을 듣고 A도 이 업무를 하지 않겠다고 나섰다. 

그는 본인의지로 온 것이 아닌만큼, 지방도 좋으니 한 달 안에 다른 지점으로 옮겨달라고 큰 소리를 치고 있다. 

핵심 사업 중 큰 축을 담당하던 이 업무에 큰 공백이 곧 발생할듯하자, 부서에서는 발등에 불떨어진 꼴이 되었다. 

업무를 가장 많이 알고 있는 나를 보내려고 하지 않는다. 

누군가 말하길 나는 어쩌면 핵심인력이라고 한다. 


그러나 번아웃 상태의 나는 더 이상 삶의 목표나 의지가 없었다. 


'사람답게 살고 싶고, 인간적인 대우를 받고 싶고, 쉬고 싶다..'

그저 원하는건 그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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