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가림이 뭔가요?

bgm. 오즈의 마법사

by 맥켈란

1984년 5월 낯이 없는 아이가 태어났다. 기어 다닐 때부터 언니 오빠들을 방실방실 쫓아다녔고, 집에 오는 손님들에게 쉽게 홀리는 망아지였단다. 세 살 즈음, 엄마 친구들이 집에 놀러온 적이 있는데, 엄마 품에 안겨있던 꼬맹이가 복희 이모에게 쪼르르 달려가 무릎에 앉아 부비댔다. “엄마보다 이모가 좋아?” “옹!” “왜? “옴마보다 예뽀잖오” 머리검은 짐승은 거두지...

태생부터 사람을 궁금해했고 라이크했다. 그래서 좆될 뻔 한적도 있다. 더운 여름날, 한 동네 사는 사촌언니와 함께 언덕길을 오르며 집에 가는 길이었다. “하~더위사냥 사 먹게 500원만 땅에서 줍고 싶다. 징짜!” 유딩꼬마 구슬땀을 닦으며 더운 숨을 고르는 찰나, 검은 그림자가 뙤약볕을 덮었다. “아저씨가 사줄까?” “앗. 정말요? 사주세요!” “그럼 여기 타렴~” 반대머리 아저씹끼가 봉고차 문을 열고 시트를 가리키는 손짓을 했다. 진짜 경계심 일도 없었다. 실실 쪼개며 차문으로 걸어가는데, 갑자기 성희언니가 내 손을 낚아채더니 앞으로 냅다 뛰었다. 그날 집에 가서 세상에서 가장 사랑했던 엄마아테 살기를 느낄 만큼 죽도록 맞았던 기억이 있다. 일러바친 언니가 너무나도 야속했는데 내 생명의 은인 1.

주목받는 게 너무 쉬웠던 아이였다. 온 우주의 관심을 감당할 수 있는 자아였다. 취미가 특기가 됐던 건 초딩때 도맡았던 오락부장 때부터였다. 친구들 앞에서 개다리춤을 추고 ‘난 알아요!’와 ‘현진영 고 진영 고’를 완창 했다. 초딩1학년 담임이었던 홍당무선생님이 사람들과 글쓰기 좋아한다는 내게 기자가 되어보라고 하셨다. 그 후 내 생활기록부 장래희망란들에는 매년 뭣도 모르고 ‘기자’라고 채워졌고, 나는 꿈을 이뤘다는 아름다운 이야기.

방학이 싫었다. ‘돈돈’ 거리며 맞벌이하는 세상 바쁜 엄마 아빠의 부재도 이유겠지만, 친구들과 공일오비 ‘이젠 안녕!’을 부르며 헤어지는 건 조그만 가슴으로 감당하기엔 너무나도 벅찼다. 매일 전교에서 1등으로 등교할 만큼 학교를 사랑했다. 사춘기를 지난 중3 때부터 고3 때까진 반장을 도맡아 했다. 감투 쓰는 것도 폼이 났지만 행복한 우리 반을 만드는 일은 정말 신나는 일이었다. 아니. 씬났다. 매 수업시간에는 꺄르르 웃음소리가 흘러넘쳤다. 자랑이지만 내게는 딱딱할 법한 수학시간도 놀이터로 만들어버리는 재주가 있었다. 호랑이 선생님도 피식 웃겨버려 농담을 주고받으며 재미난 교실로 만들어버렸다. 덕분에 우리반은 왕따도 없었고 성적도 우월했다는 아름다운 이야기.

쉬는 시간에는 제일 바쁜 아이였다. 반 친구들과는 수업 때 놀았으니, 이제 전교생을 누벼볼까 하며 행차했다. 세븐 운동화를 신고 1반부터 12반까지 달리고 누볐다. 교무실도 빼놓지 않는 지구력이 발달한 아이였다. 담임쌤 책상에 앉아 컴퓨터 게임을 즐겨했고, 교감쌤과 종종 오목과 장기를 뒀다. 졸업사진 앨범 속 1반부터 12반 단체 사진에 등장하며, 요 어린 터줏대감은 화려하게 은퇴하고 술과 함께 개설레게 성인식을 치른다.

여대생 새내기 시절은 하루 건너 하루 미팅, 소개팅, 쪼인 엠티로 이 청춘 다했다. 투투 때 헤어지고 백일이 넘으면 친구들에게 100원을 받아내 해리피아에 갔다. 쓰레기 안주와 김 빠진 맥주에도 흥이 났던 시절이었다. 중고등학생 때 전교생을 후볐다면, 머리가 조금 더 큰 이십 대 초반에는 대학교를 투어 했다. 수업을 마치면 홍대로 넘어가서 당구장에서 자장면을 시켜먹었고, 안암동 고대에서는 삼통 마늘치킨을 뜯어먹으며 머리를 삭발한 학생회 친구를 위로했다.

대학교 2학년 어학연수를 위해 떠난 캐나다에선 첫사랑만 만난 게 아니다. 중국 베이징 시장 딸 태국 수상 딸이 베프였고, 상해 자동차 회사 5개를 가진 아빠를 둔 연하남이 날 짝사랑했다. 김정은과 친구였던 대만 친구도 있었는데 아빠가 정계에서 세 손가락에 든다나 모라나. 타국에서도 매일매일 새로운 친구들과 어울리고 놀아났다. 근데 영어실력은 개판인 건 아리송한 이야기.

홍당무선생님 지침대로 기자가 됐다. 취미와 특기를 살려 일이 되기 시작하자 정말...어마어마하게 소개받고 만나고 술퍼먹고 소리 한번 내지르고 땅바닥을 기어 집에 들어갔다. 귀가를 잊고 땅바닥에서 초록병과 함께 자는 노숙자는 물론 탑골공원에서 땅 따먹는 할배들과 야쿠르트아줌마도 찾아갔다. 정보가 생명인 직업인지라 화이트컬러 술자리를 일주일에 3번 참여해 눈도장을 찍었다. 착한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예쁜 이름을 가진 ‘선방’모임이다. 당시 대기업 홍보부장이었던 우주 최강 마당발 영선 오빠가 호스트가 되어 탄생하게 됐는데, 기자는 물론 검사, 변호사, 의사, 교수, 정치인, 시이오, 연예인 등 초호화 직군들이 모여 쏘주도 마시고 샴페인도 터트렸다. 모임에서도 막내였던 나는 언니 오빠들을 효리언니마냥 10분 안에 꼬셨다. “넌 아무 목적 없이 나랑 술 마셔서 참 좋아” “요게 정치는 안 하는데 지도 모르게 정치를 해” 어르신들이 내게 자주 했던 말들이다. 암튼 눈부시지만 배고팠다는 이야기. 원래 비싼 게 맛이 없다.

어느새 삼십 대 중반 어른이지만, 마음만은 주름지지 않았다. 눈밭에서 뒹구는 개처럼. 방학식날 하굣길 뛰어가는 아이들마냥. 아직도 사람 만나는 게 좋고 궁금하다. 세월이 지나도 이 마음만은 주름이 지지 않길 바란다. 영영 온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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