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벅꾸벅 졸면서도 악착 같이 책을 읽는 이유
북 코디네이터의 투덜투덜 책사랑 이야기
저녁을 먹고 설거지도 하지 않은 채 시집을 읽기 시작했다.
제목에 끌려서 산 시집이긴 했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시가 너무 좋았다. 몰입해서 보기 시작했지만 금세 졸음이 쏟아졌다.
책을 읽고 싶다고...... 이제 좀 읽으려는데 뭐냐고...
누가 읽지 말라고 책을 뺏은 것도 아닌데 세상 억울한 기분이 드는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4년 전에도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식구들을 차례로 내보내고 숨 돌리고 앉아 책을 읽으려 하면 띵똥 띵똥 세탁 종료음이 울린다.
'아, 이 챕터만 읽고 일어서야지' 마음먹지만 그러다 까맣게 잊은 빨래를 저녁에 발견하곤 하는지라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밀린 빨래가 산더미라 다시 세탁기를 돌리고, 일어선 김에 어수선한 거실을 대충 정리하고 노트북 앞에 앉았다. 켜자마자 지난번 강의를 나갔던 학교에서 강사료 지급 건으로 빠진 문서가 있다고 연락이 왔다. 부랴부랴 서류 떼고( 자세히 안내를 했으면 생략해도 되는 일이었다) 오후엔 한 차례 더 주민등록증 사본이 빠졌다고 전화가 왔다. 처음에 제대로 안내를 했으면 모든 일들이 복잡해지지 않았을 것을...
며칠 동안 책을 읽지 못하는 괴로움이 이리 클 줄 몰랐다. 늦은 저녁 마음먹고 스탠드를 켜고 앉아도 채 몇 줄을 읽지 못하고 졸음과 사투를 벌였다.
집에 있는 날 책을 읽기는 수월치 않다. 엉덩이 붙이기 무섭게 눈에 들어오는 일거리들은 왜 그리 많은지. 촌각을 다투는 일이 아닌데도 습관적으로 몸을 일으키고, 하다 보면 자연스레 다음 일로 이어지는 일이 많은 집안일. 왜 뜬금없이 책 몇 개 자리를 바꾸다 위층 다락방 복도의 책들을 아래로 끌어내리며 수십 권 이사를 시키느라 땀을 뻘뻘 흘리는 것인지. 싱크대 서랍 정리를 한지 채 두어 달도 안 지난 것 같은데 엄마가 챙겨 준 백숙용 엄나무 봉지를 집어넣을 자리가 없어 욱여넣고는 왜 괜한 화풀이 하듯 다용도실을 한바탕 뒤집어 놓는 것인지. 갓 수확한 양파라 펼쳐서 말려야 한다는 엄마 말씀 덕분에 어찌 되었든 정리는 해서 좋지만 하루 종일 치우다 볼 일 못 본 것 같아 씁쓸했다.
겨우 숨 돌리고 앉아 책을 읽다가, 나희덕 시인의 산문집에서 발견한 문구에 일시정지 상태가 되어 버렸다.
다리미가 달궈지는 동안에도 책을 읽었다고?
나도 이 산문집을 화장실에서, 탈수를 기다리는 동안, 밥상을 차리다 아들이 샤워하러 들어간 사이, 수업 전 아이들이 도착하기 전 짬짬이 읽었다는 생각이 스쳤다. 다리미에 전원을 넣고 열이 오르기 전의 그 짧은 시간, 안타깝고도 갈급한 눈빛으로 책을 읽어 내려가는 이름도 낯선 한 시인의 마음에 동화되어 울컥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유대인 남편과 결혼한 에이드리엔 리치는 세 아이를 키우는 동안 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시를 써야 했다. 대부분의 여성 작가들이 그렇듯이 그녀는 다리미가 달궈지는 동안에도 책을 읽었다고 한다. 창작에 대한 열망과 가정에 대한 의무감 사이에서 갈등을 겪으면서도 자신의 생활과 내면을 다잡으려는 치열한 노력이 이 메모에서도 느껴진다. P132
-나희덕 산문집 <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네> 달 출판사
에이드리엔 리치. 처음 들어보는 이 시인이 궁금해 검색을 하다 마음을 울리는 글귀들을 발견해 책에 옮겨 적었다. 바짝 말라있던 가슴에 시원한 물줄기가 떨어지는 기분이다. 책 속에 나오는 여러 작가들의 이름, 창가에 꽂아 놓은 책을 가져다 펼쳐보고, 달력에 있는 작가의 사진을 다시 들여다보는 동안 소파에는 책들이 어지러이 쌓여가고, 책 속에 둘러싸인 나는 기분이 좋아졌다.
시인 에이드리엔 리치는 "시가 생존을 위한 투쟁에서 우리를 해방시켜주지는 못하지만 우리 삶의 돌발적 사태 밑에 감춰진 욕망과 열망, 또 우리가 주변의 강요에 의해 우리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 조작된 욕구와 불만을 드러낼 수 있다."라고 말했다. P268
에릭 부스 <일상, 그 매혹적인 예술> 에코의 서재
나희덕 시인의 시를 읽으며 내 안의 감춰진 욕망과 열망을 감지하는 나에게 이 단비와도 같은 글들이 반갑고 고맙다.
10분 쯤 쪽잠을 자고 일어나 다시 시집을 읽었다. 갈급한 심정으로, 한 편 한 편 제대로 음미하지도 않고 꿀꺽꿀꺽 삼키듯 시를 읽었다. 띠지를 붙이고, 메모를 하고, 밑줄을 그으면서 소리 없는 아우성이란 이런 게 아닐 정도로 내 머릿속은 분주했다.
이 시는 필사를 해야지!
이 문구는 외우고 싶네.
와 , 이 시는 글쓰기 모임에서 같이 읽어야겠어. 글쓰기의 본질을 한 방에 설명해 놨어!
신나게 읽다가도 불현듯 졸고 있는 나.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각, 온몸이 녹아내리는 듯한 피로감과 무거워지는 눈꺼풀에도 해설 부분까지 다 읽고 자겠다는 일념으로 눈을 부릅뜨고 있는 나에게 물었다.
왜?
그냥 자~ 누가 검사한대? 다 읽었는지, 꼼꼼하게 완독 했는지 확인해?
졸려 죽겠으면서 왜 그렇게 책을 읽는 거야?
모임에서 읽을 책도 아니고, 자료로 필요한 책도 아니잖아. 근데 왜 꾸벅꾸벅 졸면서도 악착 같이 읽는 거야?
나는 팔짱을 끼고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나에게 답해 준다.
그러게 내 말이...... 글쎄 왜일까. 정말 재밌어서, 좋아서 읽는 거라구. 근데 막 아까워....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걸 더 예민하게 감지하게 된 것 같아.
내가 나인 걸 의식하고, 모르는 걸 알아가고, 언어에 매혹되는 순간들이 너무 좋아.
모르는 게 많다는 걸 깨닫는 순간에도 감사한 걸. 모르는 걸 모르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이야. 알아갈 게 많다는 건 얼마나 설레냐고. 시를 읽으면 모든 것이 시적으로 느껴져서 마음이 벅차오르는 순간을 조금이라도 더 느끼고 싶어. 아까워. 읽고 싶은 게 너무 많은데, 잠자는 시간도 아까워.
그런 거다. 좋아서 하는 일이다. 나도 나를 못 말리는데 누가 나를 말리겠는가.
새날이 시작되었고 30분이 흘렀다. 꼬박 몇 시간을 책상에 앉아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나.
어깨도 아프고 허리도 뻐근하다. 괴롭지만, 결론은 이렇다. 좋아서. 그냥 좋아서 그러는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