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대왕>, 불편한 책이 남긴 중요한 의미
북 코디네이터의 투덜투덜 책사랑 이야기
새벽 2시, 체기가 내려가지 않는 것 같은 괴로움 때문에 뒤척이다 결국 노트북을 켰다. 책이 뭐라고, 이렇게 괴로울 것까지야. 책을 읽다 보면 감이 온다. 이 책이 나를 행복하게 해 줄 것인지, 괴롭힐 것인지가. 마냥 아름답고 희망적인 이야기라고 행복한 책은 아니다. 몸서리쳐지게 끔찍하고 슬프고 가슴 아파도 책을 덮는 순간 행복해지는 책이 있게 마련이다. 고통을 뚫고 선연히 솟아오르는 아름다움이 있어서, 폐부를 찌르는 메시지가 괴로워도 무지의 자각, 혹은 시선의 전환이 주는 쾌감이 있어서. 더 나아가 두 주먹 불끈 쥐고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잘 살아야겠어,라고 건실한 마음을 먹게 해 주어서 등등.
반대로 그저 괴롭기만 한 책도 있는데, 뭐 이렇게까지 적나라하게 날것 그대로를 보여주기만 하나, 혹은 그래서 뭘 어쩌라고, 구시렁대게만 만드는 책. 어느 순간 삐딱선을 타는 순간, 책은 읽기 싫어진다. 그게 아무리 어마어마한 상을 탔다고 해도.
나는 성선설 쪽에 마음이 기울던 사람이지만 지금은 성악설이 맞네, 수긍하는 사람이다. 이론에 기대지 않고 나라는 인간을 두고 따져본다면, 착한 성정을 타고났지만(그렇다고 믿지만) 지극히 못된 구석이 많은 사람이다. <파리대왕>에 극 중 인물로 출연한다면 나는 누구랑 비슷할까? 직관적 대답은 ‘모두 다’라고 볼 수 있다. 나는 마음에 지옥 하나 품고 모든 일을 내 뜻대로 하고 싶은 욕망에 시달리는 랠프이기도 하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 자괴감, 열패감에 시달리다 일을 그르치는 잭이기도 하다. 가끔은 사이먼처럼 본질을 꿰뚫어 보고 그걸 알아본 대가를 치르기도 한다. 물론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일이 아닌 관계로부터 파생되는 사소한 사건들일지라도. 아, ‘돼지’에 대해서는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다. 이름을 갖지 못한 자의 비애, 익명성 뒤에 감춰진 폭력성, 개별적 존재의 존엄을 깡그리 무시하는 별명, 은어, 속어에 대한 심각성까지. 나는 초반부 랠프가 “돼지야”라고 부르는 순간 이 소설이 끔찍해졌다. 그래, 뭘 말하려는지 알겠어. 굳이 끝까지 읽지 않아도 뭔지 알겠다고. 하지만 기대해 봐야지. 고전이잖아..... 하지만 고전의 권위에 대한 회의, 남은 생애 내가 읽어야 할 책 목록을 좀 더 신중하게 고르고 싶다는 생각, 좀 더 신중하게 번역을 비교해 보고 읽겠다는 다짐 등, 심란한 가운데 읽었더라는...
인간이 정치적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것, 권력이 생겨날 조짐이 보이는 순간부터 많은 선의들이 변질될 가능성이 많다는 것, 셋 이상이 모이면 화합보다는 분열의 수순을 밟기 쉽다는 것, 폭력은 폭력을 극대화한다는 것, 이미 수많은 책들 속에서 질리도록 봐 온 인간상을 굳이 다시 현미경을 들고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에 숨이 턱턱 막혔다. 결국은 다 같이 파멸할 수밖에 없는 우상화를 지리멸렬하게 반복하는 인류 역사에 대해 회의가 들고, 익명성 아래 약자를 한 구덩이에 몰아넣고 덩어리 취급하는 권력의 속성을 재차 확인하는 괴로움에 한숨만 나왔다. 적어도 인간 본성의 악함, 세계가 왜 이렇게 엉망진창이 되어가는지를 모르지 않고, 내가 사는 사회 속에서 실시간으로 매일 보고 있는 마당에 이런 책을 읽는 게 나에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저 회의감과 무력감만 커질 뿐. 역사의 기록에서 배제되기 일쑤였던 여성들이 이 소설에서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 또한 아쉬웠다. 그저 회상 속에서 위안의 대상으로만 등장하지만 무리들 속에 여자아이가 끼어 있었다면? 화합과 포용, 회복과 재건의 풍경이 그려지다가, 윌리엄 골딩식이라면 노예제, 성폭력, 이런 단어들이 튀어나올 것 같다는 생각에 진저리가 쳐진다. '계집애 같은 '이라는 한 마디 속에 영국 남성, 작가, 번역가... 여러 시선이 중첩되는 느낌이 드는 건 내가 너무 예민해서 일까?
우화를 썩 좋아하지 않고 알레고리 기법 또한 진부하게만 느껴진 까닭은 비슷한 주제를 풀어나가는 데 있어 훨씬 더 도움을 받은 책들이 많아서일 터.
인정. 신의. 우정은 찰나의 감정으로 등장할 뿐 인간의 악함을 집대성한 듯한 이 책이 과연 세상을 정상으로 되돌려 놓는데 기여했을까? 과연 이 소설이 무언가를 바꾸었는가?
토착민들의 삶과 대비되는 이주민, 혹은 정복민에 대한 불편한 진실을 다시금 보게 된 소설이기도 하다. 영국인답게, 그들은 섬에 있는 모든 존재들을 이용하고, 정복하고, 파괴하기만 했을 뿐 존중하고 공존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 내내 불편했다. 아마도 몇 달간 곁에 두고 아끼며 읽은 책 아메리카 원주민 포타와토미족 출신 과학자 로빈 월 키머러가 쓴 <향모를 땋으며> 때문이었다. 그 부족 출신의 아이들이 그 섬에 불시착했다면 절대로 파리가 들끓고, 인간의 피비린내가 난무하는 섬이 될 리는 없었을 게다. 자연으로부터 주어지는 모든 것을 선물로 여기며 필요한 것만 취하고, 서로 공존하기 위해 호혜와 연대의 방식으로 생존했을 테니까.
책이 주는 힘은 뭘까, 나에게는 자유로움이다. 책과 나의 관계만큼은 어떤 외부적 권위에 흔들리지 않을 자유. 읽지 않은 고전들이 꽂혀 있는 책장에서 정말 읽고 싶은 책, 특별한 인연으로 다가온 책만 읽어야겠다고 결심했다. 30 페이를 읽는 동안 나를 행복하게 하지 않을 책이면 미련 두지 말고 덮을 것. 물론 뒤에 보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을지도 모르지만. 할 수 없다. 나에게 남은 생애 읽고 싶은 책만 읽기에도 시간이 부족하고, 아름답고 황홀한 책들은 넘쳐나니까.
<파리대왕> 제목만 아는 책에서 나도 읽은 고전, 이라고 얘기하게 되어서 과연 좋은가? 글쎄.... 친구가 이 책 어떠냐고 물어본다면 이렇게 한 줄 평을.
“난 이 책 읽는 내내 인간이 지긋지긋해서 불행했어.”
아, 맨 끝에 나오는 영국 장교 한 명이 있는데, 이번에 미나리로 상을 휩쓴 윤여정 선생님이 표현하신 스노비시(snobbish)가 뭔지 알겠더라는 말을 덧붙여야겠다.
예전에 이 책을 읽었다는 남편과 간간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뭔가 표현할 말이 맴도는데 딱히 생각나지 않았다가 격하게 공감한 말은 “뭐 이렇게까지...”였다. 리뷰에 가져다 쓴 말이니 출처를 밝힌다. 대화 끝에 합의한 한 가지. 그래도 이 책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이유. 인간 본성에 대한 너무나 중요한 질문을 던지는 책이라는 것, 불편함이 세상을 바꾸기도 한다는 것. 그러니 때로 괴로운 책을 꾹 참고 읽기도 해야 한다는 것. 이런 글을 쓰게 만들었으니 이 책은 나에게도 의미 있는 책이긴 하지만 흠.... 여전히 이 씁쓸한 마음.... 쉬이 떨칠 수가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