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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화정 Jul 10. 2023

혼자서도 수다스러운 산책

남영화 <숲의 언어>를 읽고

성장만이 답이고, 강한 것만이 살아남는다는 구호는 숲에선 아무런 의미가 없다. 강하고 약하고 무르고 단단하고 작고 크고 여리고 두터운 것들이 마구 뒤섞인 숲은 굳이 강할 필요도 없고 무조건 클 필요도 없다. 그저 가진 천성대로 욕심 없이 제자리를 지키는 순리를 따르고 있으니, 그것은 내가 가장 원하는 삶의 모습을 닮았다. 23
                                                                                         남영화 <숲의 언어> 남해의봄날

내 앞에는 항상 두 개의 세상이 공존한다.

먼저, 화려하고 빠르고 거창하고 빽빽한 세상.

부러워서, 해야만 할 것 같아서 정신없이 쫓아가기 바쁘고, 늘 숨이 차고, 수시로 작아지는 내가 결국은 틈새에 끼어 버려 꼼짝달싹 못하는 상황이 되어버리는 세상. 차가운 금속성 네모 안에서 펼쳐지는 세상이다.

그럴 때면 도망쳐 숨는 또 다른 세상이 있다.

느리지만 치열하고, 거대하면서도 소박하고, 한없이 여유로워지는 세상. 집 근처의 작은 숲과 공원들이다.

이름도 모르고, 왜 그런지 알지 못한 채 그저 매혹되어 바라보던 나무와 풀, 꽃, 새와 열매들. 자꾸 들여다보는 사이 아끼고 좋아하게 되었다. 그러다 알고 싶었다. 이름이 뭔지, 무슨 의미를 담은 소리인지, 왜 그런 모양을 하고 있는지.

다 읽지도 못할 거면서 욕심껏 사서 쟁여둔 식물 관련책, 나무 책, 새에 대한 책들이 족히 천장 높이는 될 것이다. 그저 좋아하니까, 다 이해하지 못해도 더 알고 싶어서 산 책들이다.

<숲의 언어>를 달게 읽었다.


더없이 친절하고 다정하고 세심한 사람이 책 속에 있었다. 자신이 먼저 발견한 자연의 비밀이 너무 신기해서 환호성을 지르고, 사실 확인을 위해 자료를 찾고, 학자에게 도움을 청하고, 관련 책들을 찾아 비교하고 확인하면서 알아낸 신기한 이야기들이 가득 들어있는 책이었다.

전작 <숲에서 한나절>에서는 자연의 충만함에 기대어 인생을 돌아보며 겸허하게 사유하는 12년 차 숲 해설가를 만났다면 <숲의 언어>에서는 한층 고양된 감각으로 자연과 생의 비밀을 탐구하는 인생 길잡이를 만났다.

책 속에는 오래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조심스레 인간의 언어로 해석하려는 작가의 분투가 녹아 있다.


나무의 언어'에서는 천성과 순리, 단단한 내면, 연대, 적당한 균형이라는 통찰력 넘치는 언어에 머물며 나를 돌아보았다. 잎 속에 그림을 그리는 곤충과 거품을 내어 숨어 사는 곤충 등 '잎의 언어'에는 신기한 곤충의 세계가 담겨 있다. '꽃의 언어'는 또 얼마나 신비로운지. 수분의 비밀과 긴밀한 유대로 얽혀 사는 식물의 세계를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열매의 언어'를 읽다 보면 각양각색의 열매들 앞에서 경탄하는 작가 덕분에 '즐겁고 생기 있게 살 방법을 전수받을 수 있다.


그저 '눈앞에 놓인 것을 자세히, 깊이 잘 들여다보면 새로운 세상이 보이고 새로운 감정과 생각이 열린다. 224
                                                                                 남영화 <숲의 언어>, 남해의봄날


좋은 책은 독자를 가만 놔두지 않는다. 책을 덮고 나면 무엇이든 하게 만든다. 글을 쓴 이의 진심이 내게 흘러들어 책을 덮고 나면 뭐든 따라 하고 싶게 만드는 책. <숲의 언어> 또한 그랬다. 책을 읽고 난 후, 버스 정류장 옆에 서 있는 느티나무에게 속으로 말을 걸었더랬다.


'예전에 말이야, 연둣빛 아기잎이면서도 먼저 나온 잎들에 비해 지나치게 커다란 너희들이 너무 이상했거든. 작고 단단한 느티나무 잎들과 너무 달라서 말이야. 근데 햇빛을 잘 받으려고 얇고 넓게 잎을 펼치는 거라며? 굉장히 애쓰고 있는 건데 몰랐어. 미안. 그리고 너무 더운 날 느티나무 아래 서면 그저 그늘이어서 시원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 너네가 잎 뒤 기공을 열어 촉촉한 수분을 증발시키며 열을 식히기 때문에 덩달아 나까지 열을 식힐 수 있는 거라니. 정말 고마워.'


버스 정류장 옆을 가만히 살펴보면 자주 볼 수 있는 풍경. 느티나무 가로수 사이 화단에는 아기 느티나무가 자라고 있을 확률이 높다. 가지런히 다듬은 회양목 틈새로 삐죽이 올라와 너풀대고 있는 아기 느티나무를 보고 있노라면 화단 정리하다 뽑히지 않을까 늘 노심초사. 연한 잎들을 쓰다듬으며 잘 살아남아야 해, 하고 응원을 보낼 때가 많다.

인간의 언어는 나무에 가닿을 수 있을까? 책에서 배운 대로 우선 나무와 꽃과 잎, 열매의 언어에 귀를 기울이는 것부터가 시작이다. 산책을 나갈 때 옆구리에 끼고 나서면 좋을 책.

<숲의 언어> 덕분에 나는 혼자서도 수다스러운 숲 산책자가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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