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중하게 고려해 결정한 일이 실패할 때가 있다. 선의로 시작한 일이었으나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서로가 좋은 방향이려니 결정한 일이 의외의 균열을 일으키기도 한다. 시작 즈음에는 결코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 앞에서 속수무책 바라볼 수밖에 없는 상황들이 때때로 끈질기게 이어지는 것이 인생일지도 모르겠다. <여덟 개의 산>을 보고 나서 든 생각이다.
도시에서 온 피에트로와 산속 마을 유일한 아이 브루노는 열한 살 때 처음 만나 친구가 되고 광활한 자연 속에서 특별한 우정을 나눈다. 피에트로의 부모는 삼촌 밑에서 목장 일을 돕는 브루노에게 교육의 기회를 주고 싶어 했지만 브루노의 아버지는 인사를 나눌 겨를도 주지 않고 브루노를 데려가 벽돌공 일을 하며 산다. 사춘기 시절 잠시 바에서 마주친 후, 오랜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된 두 사람은 피에트로의 아버지가 세상을 뜨고 난 뒤 재회한다. 어릴 적 아버지를 따라 알프스 산에 오르길 좋아했던 피에트로는 어느 날 아버지와 브루노와 함께 빙산에 오른다. 정상을 거의 앞두고 고산병으로 되돌아왔던 날 이후부터 피에트로는 마음의 균열을 감지한다. 사춘기 시절 더 이상 산에 함께 가지 않겠다고 다툰 뒤 끝내 화해하지 못했던 자신과 달리 브루노는 아버지와 함께 산을 오르며 시간을 함께 보냈다는 걸 뒤늦게 알고 회한에 잠긴다. 아버지가 남긴 유산인 오두막을 헐고 새로 지으면서 피에트로와 브루노는 어릴 적 나눈 순전한 우정을 다시 이어간다. 장엄한 알프스의 설산과 맑고 차가운 호수,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계절의 순환 속에서 인간들은 늙고 쇠락해가고, 오두막은 낡아간다. 호기롭게 시작한 일은 경제 위기 속에서 파탄에 이르고, 서로를 걱정하고 아끼고 그리워하는 마음은 삶의 무게에 짓눌려 쪼그라들고 부서진다. 그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충만했던 어린 시절의 순전한 마음은 빙산처럼 그대로인 것 같은데, 그 빙산으로 향하는 각자의 길은 너무나 험하고 미끄럽고 고단해 보였다.
‘내가 뿌리내릴 곳은 우정이었다’는 영화 첫머리의 내레이션이 내내 귓가에 맴도는 것 같다.
우정에 대한 영화인가? 그러기엔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안타까운 어긋남이 너무 가슴 아리고, 피에트로와 브루노를 바라보는 어머니와 숙모의 시선은 애달프기 짝이 없다. 어쩌면 아버지에게는 아들이 둘이었는지도 모른다는 브루노의 고백에 이르면 우정은 참으로 다양한 모습으로 넓고 깊게 뿌리내리며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되어준다는 깨달음에 이른다.
나는 때로 속수무책 바라볼 수밖에 없는 상황들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때가 있다. 영화 속 피에트로 또한 그렇다. 오랜 방황 끝에 네팔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정착하려는 그에게 브루노의 안위는 사랑만큼이나 중요하다. 그는 그저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을 보여준다. 깊은 겨울, 홀로 오두막에 남은 브루노를 위해 배낭 가득 먹을 걸 싸들고 친구 곁으로 간다. 근본적인 해결책 따위 없다는 걸 알면서 그저 술잔을 건네거나 말없이 부둥켜 안는다. 마음의 문을 굳게 닫고 등을 돌리는 친구 앞에서 어쩌지 못하는 마음으로 돌아설 때조차 둘 사이에 흐르는 기류는 배척보다 배려였을 거라고, 그렇게 느낀 건 나의 바람이었을까.
가을이 되면 마음 곁에 바짝 놓아두는 시가 있다.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처럼 마음이 스산해지는 날, ‘그냥 있어볼 길밖에 없는’ 나를 위해 읽어주는 시. 속수무책 어쩌지 못하는 내 곁에 슬며시 같이 있어주는 시.
섣부른 위로나 충고나 조언 없이, 끝내 부끄러움이나 후회로 남을 말 따위 아예 꺼내지도 못하게 말려주는 시. 더없이 고요한 시. 김사인의 ‘조용한 일’이다.
묵직한 영화 한 편에 기울어진 마음으로 고개를 떨구고 있다가 눈을 들어 바라본 하늘이 눈부시다. 시에 기대어 글을 쓰는 가을. 속수무책이어도 다시 내 앞에도 놓인 ‘여덟 개의 산’을 올라가 보자고 가만히, 나를 달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