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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화정 Jan 03. 2020

나만의 서재, 요새와 같은.

심보선 <그쪽의 풍경은 환한가>

'우리 세대는 자신만의 서재를 가질 수 없는 세대일지 모른다.... 이 달의 베스트셀러 순위, 필자와 출판사의 유명세, 광고의 크기, 연예인들의 추천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세대의 서재는 타인의 책들로 채워진 서재이다.

-심보선 <그쪽의 풍경은 환한가> p157


상황을 비관적으로 바라보면서도 '사실은 희망하기 위해 비관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저자는 그럼에도 읽어온 책들 중에서 지대한 영향을 끼친 데다 아주 희귀하고 소중한 가치가 있는 책은 '타인의 욕망으로부터 빌려온 책이 아니라 선의, 즉 우정과 애정으로부터 선사받은 책'이라고 밝힌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때면 낭독해둔 책의 말들을 무기력한 마음에 흘려보낸다.
쓰고 싶은 글이 있어도 막막해서 한 자도 나아가지 못할 때, 뒤죽박죽 얽혀 있는 생각의 실타래들을 들고 쩔쩔맬 때 우정 어린 친구가 되어주는 책의 문장들.


'나보다 먼저 도달해 있는 누군가의 투명한 시선, 행간에 이미 은밀하게 배어 있는 누군가의 깊은 목소리(158)'를 심보선의 책에서 읽고 있지만 그 표현이 절묘하게 맞는 경험을 선사한 이는 아침에 만난 '존 버거' 다.

그의 다큐멘터리를 천천히 아껴보고 있는 중이다. <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 <A가 X에게>, <아내의 빈방>에 매료된 후 한 권 한 권 그의 책들을 사 모아 책장에 가지런히 꽂아두었다. 최근에 산 <풍경들>을 읽기 시작하면서 이 다큐멘터리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틸다 스윈튼의 내레이션과 존 버거의 육성으로 전해지는 그의 문장들은 너무나 선명하고 아름답다. 눈과 귀와 가슴을 열고 모두 다 흡수해 저장하고 싶어져서 조바심이 났다.  책을 읽을 때면 난해한 문장들에 슬그머니 책을 덮을 때도 많았는데, 그의 맑고 투명한 시선을 마주하며 육성으로 들으니 다시 그 행간으로 찾아들고 싶어졌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나 온통 아름다운 흔적을 남기고 간 한 사람을 기리는 작품 앞에서 자꾸만 가슴이 뜨거워졌다.

아름다운 것들이 주는 울컥함이 내 삶의 자양분이 아닐까.

 나는 언제쯤 이런 문장들을 빚어낼 수 있을까? 부러움과 감탄이 뒤섞인 심정으로 심보선의 [우정과 애정의 독서]라는 챕터를 다시 읽고 이 글을 쓴다.

존 버거의 책들로 가득한 내 서재가 타인의 기준과 세상의 잣대로 흔들릴 때마다 굳건히 나를 지켜주는 요새 같은 서재, 나만의 서재가 되길 꿈꾼다.

#그쪽의 풍경은 환한가
#문학동네
#북코디네이터의책꽂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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