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0 봄볕이 좋아, 햇차 들이고
19세기 중반, 무이산에서 동정산으로 옮겨 자란 청심오룡은 해발 1700고지가 넘어가는 아열대 기후에서 짙은 운무를 덮고 살아왔다. 청차의 귀족, 동정오룡. 그리고 그것이 특유의 향을 간직한 채 40년을 지냈다면, 그 묵은 세월을 우리는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오룡은 그윽한 화과향으로 아찔하게 정신을 흔들어놓는다. 배화의 정도에 따라 청향을 내세우기도 하고, 진한 훈연향을 우선하기도 한다.
지금 앞에 두고 있는, 내 나이 만한 오룡은 대만의 진미다원 여례진 차인이 정제한 것이다. 제다하여 태어날 때는 청향이었을 테고, 이후 복배하지 않았다. 밀봉된 차봉지를 열었을 때 청향은 사라졌으나 은은하게도 꽃향과 진향이 흘러나왔다. 건조한 곳에서 귀하게 보관하였음에 틀림없다. 수십 년 동안 향이 빠지지 않았다는 건, 태생의 순결함과 더불어 제다의 엄격함과 보관의 치밀함이 어우러진 결과일 것이다.
3g을 120cc 자니호에 우리기로 했다. 잔뜩 호와 잔을 덥히며, 덜어낸 차를 들여다본다. 화려했을 잎이 세월에 침착되었다. 열기가 가득한 호 안에 차를 덜어내리니, 오룡의 건향이 솔솔 올라온다. 청향은 희미하게 물러났으나, 진향을 필두로 오룡의 정체성이 전혀 왜곡되지 않았다.
호에 물을 부은 후 미리 준비한 문향배에 첫 잔을 양보하였다. 문향배는 마음껏 첫 잔을 머금은 후 빈 잔에 향을 가득 담아 되돌려줄 것이다. 그리고 첫 맛을 보았다. 차의 오미가 고르게 어울렸다. 그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차맛이 보존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잘 만들어지고 또 묵은 차가 공통적으로 보이는 내포성 역시 대단하다. 몇 번을 우려도 맛의 변화가 적다. 다섯 우림부터는 혓뿌리로 단맛이 찾아들었다. 아, 이 천연의 단맛. 일곱 우림이 넘어서야 맛이 빠지기 시작한다. 나와 함께 늙어가는 이여. 두고두고 함께 어울릴 만한 갑장이 생긴 것이다.
오룡 한 잔을 식혀두고, 차솔을 물에 불렸다. 말차를 진년오룡에 개어 먹을 요량이다. 싱그러움을 대표하는 말차에 경륜을 더하면 삶이 완전해질까. 아니면 불화만 더해지려나. 나카무라토키치의 농차용 말차를 덜어넣었다. 그리고 차솔을 불려 격불했다. 부드러운 격불의 비법은 '뜨거운 다완, 차갑게 개기, 한껏 불린 솔, 꼼꼼한 비비기'이다.
진하게 우렸다. 농차는 진해야 제맛이다. 박차는 가볍고 깔끔해야 한다. 나는 개어 놓은 말차에서 나는 고소한 향을 참 좋아한다. 그리고 비벼놓은 말차를 마시며 쌉싸름한 언덕을 완만하게 타넘는다. 싱그러운 봄 새싹이 좌악 깔린 그 언덕.
오룡과 말차로 다시 한 번 호사스러운 한 밤을 보낸다. 깊어가는 밤, 또렷한 정신, 가끔은 이렇게 시간을 역행하는 일 또한 즐겁다. 즐겁다.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