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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여자들

by 지구비행사

정신없이 등원을 마쳤다.

거실 위 늘어진 장난감과 식탁 위 어지럽게 놓여 있을 빈 그릇이 눈에 밟히지만, 시간이 없다.


오늘은 카페에서 같은 유치원을 다니는 엄마들과 모임이 있는 날이다.


빗질조차 못한 머리 위로 모자를 눌러쓰고, 경량 패딩을 걸쳤다.
크록스에 발을 급히 욱여넣다 ‘그래도 사람을 만나는데 너무 꾀죄죄한 모습으로 나가는 건가?’ 싶은 마음에
운동화로 바꿔 신고 현관을 나섰다.


’ 휴… 예전엔 약속 시간에 절대 늦는 일이 없었는데, 그런 나 대체 어디 갔니?’


아이를 낳고 나서, 매번 서두르는데도 이상하게 지각은 피할 수 없다.


‘분명 거울 한 번 못 보고 서두른 것 같은데, 시간이 언제 이렇게 흘렀지..?‘




“여기예요, 여기!”

소민 엄마가 손을 흔든다. 긴 머리, 안경, 늘 단정한 차림. 등하원길마다 거의 매일 마주치지만, 언제 봐도 흐트러짐이 없는 사람이다.



“죄송해요. 늦었죠? 아침부터 아이가 원에 안 간다고 울어서요.”
나도 모르게 변명부터 나온다.



“괜찮아요, 우리도 방금 왔어요. 커피 시킬까요?”

성준 엄마는 늘 KF94 마스크를 쓴다. 그래서일까, 모임 때마다 마주치는 그녀의 맨 얼굴이 낯설다.



“여기 브런치가 맛있다던데, 배고프세요?”
재취업을 앞두고 마음이 복잡한 서현 엄마가 묻는다.

아무도 대답이 없다. 잠시의 침묵.


눈치 빠른 성준 엄마가 분위기를 읽었다.

“저는 괜찮아요. 오늘은 커피만 마실까요?”
“좋아요.” “저도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빠른 동의가 오간다.


남편의 월급날이 코앞이라, 브런치까지 시키는 것이 부담스러웠는데 다들 비슷한 마음이었나 보다.




“그 이야기 들었어요? A유치원에 영어 집중반 생긴대요.”

소민 엄마가 운을 떼기 무섭게 수다가 시작됐다. 주제가 아이에서 남편으로 옮겨가자 테이블은 금세 소란스러워졌다.


두 시간쯤 지났을까.
모임을 위해 미뤄둔 일과 넝마가 된 거실이 내 머릿속에서 점점 커질 무렵, 눈치 빠른 성준 엄마가 먼저 운을 뗐다.


“이제, 그만 가볼까요?”


두 시간 수다를 떤 덕에, 할 일이 두 시간어치 더 늘었다. 막막한 마음에 집에 가는 것이 괜스레 내키지 않았다.


“저는 할 일이 있어서요… 조금 더 앉아있다 갈게요. 먼저들 가세요. “




식어버린 커피를 홀짝거리며 생각한다.
이런 모임이 몇 번째더라... 네 번째던가?
그럼에도 다들 오래 만난 친구처럼 말이 잘 통하는 것 같네.



그러다 문득, “이름이 뭐지...?”


여러 번 커피를 함께 마셨고, 일상을 나눴다. 그러나 정작, 나는 그녀들의 이름은 모른다.


그뿐인가? 그녀들이 좋아하는 음식은 무엇인지, 음악은 무엇인지, 어떤 옷을 즐겨 입는지— 모른다.


‘아, 나는 그녀들과 모르는 사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오래 알고 지낸 친구 같다고 생각했던 내가, 문득 우습게 느껴졌다.



주위를 둘러본다.

이름 없는 여자들이 이곳에 있다.
카페를 가득 메우고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이름 없는 내가 있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은 뭐지? 음악은?
경량패딩과 크록스를 교복처럼 입고 다니는 난, 원래 무슨 옷을 입던 사람이더라...?’



나는 오늘 브런치를 먹고 싶었을까,

먹고 싶지 않았을까.
이젠 그것조차 잘 모르겠다.


‘삐-삐비빅, 삐빅’


알람이 울린다. 혹여라도 수다에 빠져 집에 갈 시간을 잊을까 봐 맞춰둔 것이었다.


’ 이럴 시간 없어. 서둘러야 해. 곧, 하원 시간이야.‘

오늘도 내 이름이 서두르는 발걸음만큼 지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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